“헤어지자.”
나의 두손을 꼭 잡고 있는 그의 눈가가 촉촉하다.

“뭐?”

“이혼하자고.”
“미쳤어?”
“그렇게 하자. 예지야.”
“이러지마. 오빠.”

“더 이상 너를 이렇게 둘수가 없어.”
“이혼하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
“너가… 다시 한예지가 되겠지.”
“내가 그러길 바라는거야?”
“너가 다시 웃고. 행복할수있다면.”
“오빠는?”
“나는…괜찮을거야.”

그가 나를 본다. 눈물이 가득 고인눈으로. 내 가슴이 시리도록 깊은 그 눈동자로. 나를 보고있다.
나를 아직도 사랑하지 않냐고.  검은머리 파뿌리가 되도록…우리의 약속은 어쩔것이냐고..
울부짖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 사랑은 이제 너무 지친것인가.
나를 위해 모든것을 희생한 이 사람을. 나는 버릴수 있는가.

그런데. 사실은 나도 백번 천번 생각했던 일이다.
이제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내자신을 위한 마지막 발악일까.
끝까지.
나는 이 사람보다 나 자신과 내 일을 더 사랑한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미움과 원망이. 내 마음에 깊게 자리잡은 상처들이…
나의 사랑을 모두 빼앗아 간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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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만남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젊고 풋풋한 시절이었다.
둘다 철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시절이었다.

“야. 한예지! 너 이런식으로 할거야!”

민우석이 또 소리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다.
“너 대사 안 외우고 어떻게 연극할래? 너 반반한 얼굴믿고 그냥 멍하니 그렇게 서있다가 나갈래? 너 정신 어디 두고있는거야!”

민우석이 무섭게 화를 내고 얼굴이 시뻘개졌는데 나는 왜 갑자기 웃음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우리 학교 연극부에서 성질 급하고 불같기로 소문난 선배.
신입생들에게 민우석은 특히 더 혹독했다.

“웃어? 웃어!!” 민우석이 대본을 집어 던지고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야… 미소 지워. 빨리!” 옆에서있던 지혁이가 허리를 꾹꾹 찌른다.
“선배 화나면 정말 무서워. 빨리 고개숙여!”

웃음을 삼켜먹는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눈물이 찔끔 나올정도로. 나는 급하게 감정을 수습하려 노력했다.

“뭐가 웃긴데?” 민우석이 나를 곧 잡아먹을듯 얼굴을 들이대며 묻는다.

“너 정신못차려? 지금 같은 씬을 몇번째 하는건데. 남들 시간낭비하는게 재밌어?”
“죄송합니다.”

“너같은건 필요없어. 오늘부터 관둬. 당장 내려가!”

내가 잘못한건 맞은데. 대사가 생각이 안나서. 그리고 갑자기 웃음이 튀어나온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내가 무너져야 하는가? 들어온지 한달만에 벌써 쫓겨나가는건가?

“제가 잘못했어요. 근데요.”

그의 돌아서는 팔목을 붙잡았다.

“무지하게 억울하네요. 대본이라고 오늘 아침에 주셨는데. 제가 천재가 아닌이상. 이정도 실수는…좀 너그럽게 봐주세요. 웃은건 죄송한데요. 그건 생리적인 현상이라 어쩔수 없었구요. 그리고 이렇게 사소한일로 연극부를 그만두라 하시면 남아날 사람이 어디있어요?”

민우석이 차갑게 나를 돌아본다.

“너말고도. 아주 많이 있어”
사실 민우석 선배가 싫지 않았다. 그의 그런 불같은 성격이. 시원하기도 했고. 좀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었다.

“저 연극부하려고 전공도 바꿨어요. 차라리 절 보고 죽으라고 하세요.”

“잘가라.”

그는 정말로 못.됬.다.
멋있어 보였다는 말은 취소해야…
무대에서 터벅터벅 내려오는데,

“야…그 꼬마 불쌍하지 않냐?”

뒷자석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두들 어두운 객석에 앉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그제서야 알아보는데,
그 사람이 씨익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림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대단한 시인이거나. 예술가이거나. 아니면 거지이거나…
길게 풀어헤친 머리. 겹겹이 싸입은 셔츠와 쟈켓. 그리고 구멍난 바지하며…

“…” 민우석은 그를 아는모양이었다.

“선배…”
“왜이렇게 오랫만에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다들 그에게 조아리며 인사를 하고 난리가 났는데,

그가 실실웃으며 무대쪽으로 걸어온다.

“꼬마 말에도 일리가 있잖아?”

민우석이 곤란한듯 눈길을 어디에 둘줄 모른다.

“새로온 애가 너무 건방을 떨어서...” 민우석이 말끝을 흐린다.

세준이란 사람은 천천히 무대쪽으로, 무대 뒷쪽으로 향해 걸어나오는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죽는다잖아. 좀 봐 주지?”

가까이서보니 차림새와 다르게 얼굴은 멀쩡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중얼거렸다.
“가서 눈물 한방울 떨어뜨리고 빌어봐. 그정도 연기는 할수 있지?”
“안 받아주시면요.” 나도 중얼거렸다.
“받아줄거야.” 그가 씨익 웃고는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바쁠텐데. 여기까지 어떻게...” 민우석은 그가 별로 반갑지 않은듯 하다.
“준비는 잘 되가나?”
“멀었어. 연습시간은 얼마 안남았는데…”
“시간많다고 연기 잘하는거 아냐. 극의 흐름을 이해해야지. 자 다들 모여봐. 어이. 꼬마도 이리와 앉고.”

우물쭈물하는데, 세준이란 사람이 나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  민우석은 못마땅한표정으로 시선을 피했고.
생각해보니 나에게 이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싶어 냉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다들 이렇게 고분고분한건지…?
그는 모여앉은 후배들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목소리 하나만으로 충분히 사람들을 이끌어낼만큼. 힘있고 선명하고. 또 자신감에 차 있는, 촉촉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연극은. 대사뿐이 아니고 사람의 숨쉬는 소리까지 들려야 돼. 조금이라도 꾸미고있다는. 거짓말이라는 의심이 들면. 관객들은 의미를 잃고. 재미를 잃지. 니들은 지금 되게 열심히 연기하는데, 지켜보는 사람한테 전해지는게 열심이라면. 그건 이미 실패야. 진짜로 캐랙터를 이해하면. 니들 숨쉬는거 그 자체가. 관객들에게 캐랙터로 전달되는거야.”

모두들 그에게 빨려들어가 있었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그의 모습을 지켜본다.
순간 세준이란 사람옆에 묵묵히 고개숙이고 서있는 민우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기분이 나쁜듯하다. 연극부 멤버들이 모두 하늘같이 모시는 세준. 민우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암말 못하고 서있다. 나때문에 그런건가? 싶어 그를 조심스레 살피는데, 갑자기 그의 눈과 내눈이 마주쳤다.
얼른 못본척 눈길을 돌렸는데,

민우석은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있는 내모습이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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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연극부에 일찍 나갔다.
무대 청소도 하고, 대본도 열심히 외워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갔는데,

민우석이 들어와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보더니.

“선배니임~!” 내가 살랑살랑 조심스레 다가갔는데,

“야. 명운이부터. 시장 씬 시작한다. 기철이. 민주랑 같이 손잡고 나오고.”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선배. 예지는요? 제 파트너인데…” 지혁이 만세!

“민혜 어딨어? 민혜가 대신 해.”

다들 나를 불쌍하게 쳐다본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 내가 뭘 그렇게 대단하게 잘못했다고!  신고식이라도 치르라는 건가..
묵묵히 앉아 연극부 연습을 뒷자리에서 구경했다.

2시간의 연습을 마치고 부원들이 하나, 둘씩 강당을 빠져나가는데,
민우석이 가장 마지막으로 걸어 나왔다.

“선배님!”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데,
그는 나를 못본척 지나가려 했다.

“선배님!”

그는 말없이 나를 또려지게 보았다. 심장이 뜨끔. 하며 멎는것 같았다.

“저.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대본도 다 외웠구요. 준비도 해 왔구요. 무대청소. 제가 다 할수있어요. 아니. 뭐든 시켜주시면 다 할수있어요.”

“마침 잘 됐네. 가서 의상실 정리하고. 무대는 걸레질좀 빡빡 해놓고.”

“그럼. 시켜주시는 거예요?”

“글쎄.”


그는 유유히 걸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몰래) 째려보다 지친 나는 의상실쪽으로 향했고.
사방으로 널려진 소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소품을 정리하는중.  여기 저기 먼지를 닦기 시작했는데,
옷걸이에 사방팔방 걸려있는 옷들을 옷장에 넣으려고
먼지가 쌓인 소품 옷장속을 열어보니 아주 몇년은 아무도 청소를 하지 않은것 같았다.
어유… 먼지를 닦으려고 구부려 바닦에 걸레를 밀어넣었는데,

뭔가 부스럭 거렸다.
어?
종이 뭉탱이였다.

윤세준.
먼지에 쌓여 흐릿해진 이름이 보였고,

세준이라면… 어제 그사람인가?
싶어 먼지를 털고 대본을 열어보았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손때가 묻어있는 정도였고, 정말 대단하다 싶을만큼 빼꼼히 노트가 적혀져 있었다.
어머. 이 사람. 중요한것 같은데. 이런걸 칠칠맞게 여기 쑤셔 박아 놨을까? 오래돼서…버린건가?

아무래도 함부로 두면 안될것 같아서 가방에 조심스레 넣어놓았다.
근데 그 사람을 어디서 또 만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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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수업이 끝나자 마자,
그날은 연습이 없었는데도 나는 연습실로 뛰어갔다.
역시. 연습실에 민우석이 있었다.
무대에서 왔다갔다 하며 뭔가를 열심히 적고있었는데,

“선배니임~~~~!!” 소리지르자,
그가 놀란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청소해논거. 보셨죠?”

민우석은 못본척 다시 고개를 돌린다.

“진짜진짜 깨끗하죠? 저. 어제 밤늦게 까지 정말 열심히 치웠거든요.”

민우석이 가방을 챙기더니, 일어서서 나가려 한다.

“선배님!”

나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저…다시 시켜주시는거죠? 저 다시는 안 까불께요. 저 안웃을께요. 이제부터 절대로 안 웃을께요.”
민우석이 한숨을 쉰다.

“너가 진짜 그렇게 치워놓을줄은 몰랐다. 윤세준만 아니었으면. 너를 받아줬을지도 모르지.”
“네?”
“그 녀석이 그날 너를 감싸고 돌지 않았으면 말이야.”   그녀석이라고? 선배한테...왜 갑자기 야자야?

“네? 그게…저…저 그분 몰라요! 그분이 왜 그러셨는지. 전 몰라요 선배님!”

민우석이 차가운 표정으로 쟈켓을 걸쳐입고 나간다.
쫓아서 뛰어나갔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 그 사람 몰라요. 그사람이 절 봐주라고 한게. 제 잘못인가요?”

“너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다만. 난 윤세준이 하라는데로 하는 사람이 아니란거지.”

무슨 저렇게 말도안돼는 일리가…
웃기는 사람이네 민우석?
갑자기 그녀석. 어쩌구 하면서…
암튼 굉장히 그를 미워하는것 같다. 윤세준과 민우석이 어떤 관계이길래… 이렇게 내가 희생양이 되야 하는건가?

욕이라도 해주려다가. 생각해보니 그럼 영영 연극부를 할수없을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고, 전공을 못 정해 일년을 내내 헤매고 다녔다.
작년 대학 축제때. 처음으로 연극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제는 이렇게까지 해보고 싶은일이.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일을 놓칠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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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석을 쫓아다닌지 일주일.
이제 거의 스토커 수준이 되어있었다.
그는 아예 내 말을 들으려고도, 대꾸를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말도 안돼는 이유로 나를 안 받아주는 그에게 오히려 오기가 생겼고
그날도 한참을 간청하다가 지쳐서 뒷자석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삐그득…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윤세준. 


오늘도 역시 그 허접한 차림으로 모자까지 푹 눌러 쓰고있다.
아직 무대위에 있는 연극부 사람들은 윤세준을 보지 못하고 연극에 열중하고 있었다.

저사람은 나의 웬수일까. 동지일까.
그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면 날 받아줬을거란 민우석의 말은 또 뭔가?
생각을 하고있는데 그는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듯 앉았다.
그에게서 붕어빵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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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드디어 시작을 해 버렸습니다.
컬럼이 생기기 전에는 쓰고싶을때 쓰고, 생각안나면 안쓰고..ㅋㅋㅋ
하루도 빼놓지않고 글을 쓰기는 하지만, 막상 올리자니 용기가 나질 않더군요.
시작만 해놓은 이야기가 족히 10편은 되는것 같습니다.
슬픈이야기. 실없는 이야기. 개꿈같은 이야기. 어두운 이야기, 코메디같은, 또 말도안돼는 이야기등...
그래도 아직 초보니까.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리라 믿고 -
가장 마음이 가는 이 글,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택하여 써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사랑하는 책인데요 - 저희 아이들에게도 늘 읽어주는 책이기도 하구요.
이렇게 제목을 빌려와도 되는지 모르지만. ㅋㅋ 열심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호기심으로 글을 쓰고있어요.
제가 가장 궁금하거든요. 이 인물들을 또 나는 얼마나 사랑하게 될것인가.
아무리 스토리가 괜찮은듯 해도, 나오는 인물에대한 애착이 없이는, 글이 잘 안써지더라구요 -

사실 이번에도 호화 캐스팅을 하긴 했는데...
확 깨시는 분들도 많으신것 같아...올리지는 않았습니다. :D
혹 말이 안되는 부분이나 제가 잘못알고있는 사실이나,
또 지적하실것이 보이시면 가차없이 글 올려주시구요,
쪽지로 보내주셔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사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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