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쫓겨났나?”
“….”   이 사람 때문에. 이 사람만 아니었으면. 씩 씩 콧바람이 나오다가… 그치만 왜?

“우석이가. 안된데?”
“아저씨땜에 안된데요.”

그가 휙 돌려 나를 빤히 본다.

“뭐. 아저씨?”
“민우석선배님이랑. 원수지간이예요?”

그가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픽 웃는다. 웃더니, 하얀봉투에서 붕어빵을 하나 꺼낸다.

“자. 이거나 하나 먹어라. 지금 막 사온거야.”
“싫어요.”

“붕어빵 싫어해?”
“아저씨랑 친한것처럼 보이면. 민 선배가 절 영영 쫓아낼거예요.”

그가 훗…하더니,
“그럼 진짜 친해져야 겠는데?”
“지금 저를 가지고 장난치세요?”

흠…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무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연극부원들이 하나둘씩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기 시작했고,

으아악…. 왜 저러지. 저사람이 뭘 어쩌려고…

“민우석. 잘 있었어?”
그가 민선배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어놓는다.
민우석은 놀라서 그를 돌아보고,

“선배님!”
또 부원들이 난리가 났다.
“선배님! 저 오늘 좀 봐주세요.”
“저두요. 오늘 장면이 너무 애매해서요…”

민우석의 찜찜한 표정이 역력한데,

“우석아. 전에 그 꼬마 있지?”
민우석이 그제야 뒷자리에 숨어 눈만 빼꼼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너 필요없으면. 내가 좀 데려다 써도 될까 해서.”
“데려가다니?”

“아니. 엑스트라로… 쓸만할것 같아서.”
“안돼. 연극에 파트때문에”

“그래?… 다른 부원한테 맡기면 안돼나?”
민우석이 잠시 한숨을 쉰다. 화가 난사람처럼…

“야. 한예지. 다음 씬 준비해야지.”

다들 좀 어리둥절하다. 나도 눈이 뚱그래져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아…그렇구나. 난… 그냥 구경꾼인줄 알고. 미안하다.”
그가 피식 웃더니, 돌아서서 걸어나가는데,

“선배님!! 그냥 가시면 어떻해요!”
“선배님! 좀 봐주시고 가셔야죠..”

다들 또 아우성인데,
그는 앞으로 서둘러 챙겨나가는 나를 보고 웃었다.

“잘 해봐라. 우석이 잘 받들어 모시고. 무대에서 철이 들어야 연기가 뭔지 알지.”
그의 웃는 얼굴을 뒤로 하고 나는 서둘러 민우석의 눈치를 살피며 무대위로 뛰어 올라갔다.

“잘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님.”

민우석이 잠시 날 노려보더니,

“자. 시작해봐.”

죽을 각오를 하고 연기를 했다.
대본을 하도 외워서 상대방 대사까지 줄줄이 나오니, 타이밍이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한예지!”
그런데도 민우석은 화난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네..선배님.”

“힘 빼. 지금 너 혼자 연기하는거야? 니가 주인공이야?”
“네…주의 하겠습니다.”
“책 읽는것도 아니고, 무슨 대사를 그렇게 빨리 가나? 이런식으로 선배님들 시간 낭비할래? 다시 해!”

못외운다고 난리칠땐 언제고…가뜩이나 주눅드는데…정말 선배님은 너무 가차없었다.
그제야 몰입에서 좀 깨어나 보니 뒷자리에 윤세준이 아직 앉아있었다.
그는 여전히 웃는얼굴로 나를 보며 붕어빵을 먹고 있었는데,
그렇게 웃으며 그가 나를 보고 있는것이 무척 챙피하게 느껴졌다. 저 사람은. 할일도 없나?

힘든 연습을 마치고, 모두들 짐을 챙겨 들었다.
여주인공이라서 민우석에게 그날따라 한참 깨진 민주선배가 옆에서 한숨을 푹 쉬는데…
“언니”
민우석의 눈치를 보며 나지막히 민주의 손을 잡았다.

“선배님, 피곤해요?”
“어. 예지야. 너도 힘들었겠다.  민선배. 원래 그러는거. 알지? 너한테만 그런거 아냐.
그래도 한번 안된다면 안되는 사람인데. 다시 들어와서 정말 잘 됐다.”

“응…근데. 그 사람말이예요.”
“어?”
“그…세준이라는…”
“세준선배?”
“그 사람이. 대체 누구예요?”
“우리학교 레전드지. 몇년전만 해도. 우리 연극부. 별볼일 없었거든. 세준선배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거야. 지금은 광화문에 스카웃트되서 꽤 대단한 영화 조감독 하신다 그러더라. 그 선배, 되게 멋있지 않니? 근데 그 선배가 널 은근히 도와주는것 같더라. 넌 모르는 사람이야?”

“야. 한예지.”
민우석이다. 얼른 뒤돌아 보았더니,

“청소랑 마무리 잘하고 가. 내일 연습할 의상좀 챙겨놓고. 뜯어진거 몇개 있던데. 고쳐놓고.”
“네 선배님.”

민주언니가 나를 가여운듯 쳐다본다.
“너도. 끈기있다, 얘.”
“제가 뭐든지 하겠다 그랬거든요…청소든. 걸레질이든. 몸종으로 쓰시라고 안 한게 다행이죠.”
“훗…너도…그렇게 연극부가 하고싶니?”
“…네…”
“그래. 잘 해봐. 언니가 도와줄께.”
“고마와요 선배.”

겨우 다시 연극을 하게 되서 기뻤지만, 그날따라 몸이 많이 피곤했다.
일주일내내 연극부를 왔다갔다 거리며 민우석을 쫓아다녔고,
의상실을 치우고, 무대 걸레질을 하고.
더구나 중간고사가 코앞이라서 밀린 공부도 많이 있었는데.
오늘은 무지하게 열중해서 연극연습을 하기도했고,
드디어 하고싶었던 연극을 다시 하게되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이 스르르…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무대위로 흩어진 의상과 소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상실에 들어가보니 또 다들 옷을 갈아입고 던져놓고 난리를 쳐놔서 족히 한시간은 더 치워야 할것 같았다.

잠시 화장대앞에 앉아 고개를 파뭍었다.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니,
민우석이었다.

“선배님!”
벌떡 일어나 섰는데,

그는 말없이 의상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 잤다고 생각했지만, 시계를 보니 한시간이 지난 후였다.

“제가 할께요!” 얼른 일어나 그의 손에 잡힌 의상들을 뺏어들려고 다가갔는데,

“피곤하면. 집에 가서 자.”
“아니예요. 안 피곤해요. 제가 할께요.”
“늦었어. 이만 가봐.”

어. 이 인간이 왜 갑자기 착한척을 하고 이러나. 또 트집잡아서 날 쫓아내려고..?

“가 보라고.”
차마 발길을 옮기지 못하는 나를 보더니,

“너. 윤세준이랑. 알어?”
눈이 커지는 나를 보며, 민우석은 픽. 웃었다.

“절대로 아닌데요. 전 그 사람 오늘 두번째로 봤거든요.”

“그래. 알았어. 잘 가라. 내일은 연습 없으니까. 다음주에 보자.”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아주 허리가 부러지도록 인사를 했다.

내가 왜 이렇게 아부성이 심하지? 민우석이 뭐 내 주인님이라도 되나.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보니,
그도 많이 피곤해 보였다.
연습내내 이사람 저사람에게 그렇게 고함을 질러대고 성질을 부렸으니. 피곤할만도 하지…

강당을 나와서 걷는데 나도 모르게 쯧쯧쯔….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가 그렇게 불쌍한가?”
“으악!”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 목소리에 나는 놀라 자빠졌다.

웃고있는 그 사람은 또.
윤세준이었는데.
레전드고 뭐고. 내가 보기엔 무척 할일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우석이 기다렸지. 아직 멀었나?”
“왜…요.”

아니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왜 내가 궁금한데?

“곧 나올실거예요. 안녕히 가세요.”
그는 그냥 싱겁다는듯 피식 웃었는데.

퍼뜩.
생각이 났다.
아…대본!

가방을 열어보니 지퍼안에 고이 모셔둔 그의 대본이 보였다.

“저기요. 선배님.”

난간에 기대어 서있던 그는 나를 힐끔 돌아보았고,

나는 그에게 대본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의상실에 누가 버린거 같은데…선배님 이름이…맞죠?”

대본을 받아들은 순간 그는 얼음같이 굳어졌다.

어떻게 보면 손이 떨리는것 같기도 했는데. 그는 무척이나 놀란것 같았다. 왜 저러나?
그는 대본을 주머니에 쑤셔 넣더니,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표정이 너무 심상치 않아서 나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대체 무슨일이 있길래…

그는 뛰어가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이 멀어져 가는데… 갑자기 강당문이 확 열렸다.

“넌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일부러 가라고 보내줬더니. 미안하든?”
민우석이다.

벙쪄서 서있는 내가. 아직도 자기에서 쫄아서 기다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그게 아니고…”

“저녁 먹어야지?”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대를 떠나온 그는 얼굴 표정부터가 달랐다.
친절하게 저녁 먹어야지 하는 그의 발언이. 너무나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는데…

“뭘 그렇게 봐? 욕을 안하니까 나같지 않냐?”
“…네… 이상해요.”

“나 그렇게 나쁜놈 아니야. 답답한 꼴을 못보는것 뿐이지. 연극부가 아니고. 다른데서 만났다면 말이야.”
내가 암말 못하고 쭈삣거리자, 그가 풋. 하고 웃었다. 정말 생소했다 그의 웃음이란.

“너 국수 좋아하냐?”
“네?”

“그동안 수고했다고. 내가 사줄께. 여기서 가까운데야.”

생각해보고 말고도 없이 나는 똥강아지처럼 그를 졸졸 따라갔다.
나는 아직도 그에게 쫄아있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우석아! 저녁먹으러 왔어?” 아줌마가 굉장히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니. 반가운 정도가 아니라…
“우리아들. 배고팠겠다. 뭐 먹을래? 어… 이 아가씨는… 누구야…?”
“신입생이예요. 오늘 좀 고생한 친구라. 따뜻한거 먹여 보내려구요.”

얼굴표정이 굉장히 따뜻한 아주머니였다. 항상 웃으시는지, 입가에 미소주름과 예쁜 보조개도 있으셨다.
“어서 와요. 여기 앉아. 먹구싶은거 있음 다 말하고.”
아줌마를 보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정말 친절하시고, 따뜻하시고. 어릴때 엄마를 잃은 나에게는.
처음 뵈는 아주머니의 따뜻한 웃음도. 손길도. 너무 정답게 다가왔다.
근데 아들은 왜 저리 어머니를 안 닮고…

“앉아라.”
아니다. 그 순간 그의 웃는모습은. 어머니와 퍽 닮아있었다.
정말 무대밖에서 민우석은. 원래 이렇게 정다운 미소를 가진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