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챙기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아이구. 이게 누구셔요!”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셨다.

윤세준이다.

아까 연습실 밖에서 도망가듯 뛰어갔던.
그 때 그 표정과 별로 다르지 않은.
곧 잘 웃던 예전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나와 민우석을 번갈아 보다가….

“안녕하셨어요. 건강하시죠.?” 그가 민우석의 어머니를 의식하더니 굳어졌던 표정을 풀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왠일이셔요, 여길 다 찾아오시고?”
“우석이좀…만나러 왔습니다. 그간 별일 없으셨죠? 우진이도…잘 있죠?”
“그럼요. 그럼요. 다…덕분에…”

나이도 그리 많지않은 윤세준이란 사람에게 아주머니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셨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민우석이 나를 보더니,

“잘 가라. 한 예지.”
그의 표정이 너무 딱딱하고 차가와서, 나는 좀 당황스러웠는데,
어서 빨리 사라지라는 소리로 들려서, 나는 잽싸게 문을 열고 뛰쳐 나왔다.

어…잠깐.  내 가방!
그러나..지금 다시 들어가면 민우석 선배가… 차갑게 돌아보던 얼굴이 생각나서…

우씨…별수없었다. 조금 시간낭비가 될지라도 윤세준이란 사람이 나오면
내가 슬쩍 들어가서 가지고 나와야지..
어디서 기다릴까..하고 골목을 둘러봤는데,

가게 옆에는 이 동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화로운 승용차가 주차되어있었다.
누가 이런 차를 이런 골목길에… 싶어 입을 헤 벌리고 보는데,
안에서 한 여자가 운전석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너무너무 세련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썬글라스로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새하얀 피부와 새빨간 립스틱의 조화로. 예쁘게 그려놓은 조각같은 이목구비였다.
그녀의 긴 물결 모양의 머리는 19세기 영국 귀족들이 잠자기 전 풀어놓은 로맨틱한 컬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아니. 근데 왠 밤중에 썬글라스?  혹시…

“어머. 채하연 아니야?” 지나가던 고등학생이 친구를 툭치며 신기해 한다.

그녀는 길쭉길쭉한 다리를 시원하게 드러낸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아직 쌀쌀한 4월의 날씨. 춥지도 않나? 싶었지만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침 흘리겠다. 연예인 처음 보니?”

우웩. 나는 향수 알레르기가 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찡그리자,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듯 허… 하고 지나치더니,
민우석의 식당문을 드르륵. 하고 열었다.

어머. 저 여자는 저길 왜 들어가?
아……
그렇지!  이제 저여자가 들어갔으니 더 늦기전에 나도 슬쩍 들어가서 가방을 꺼내올까?

왜 그렇게 바보같은 생각을 했을까.  더 기다리던지 차라리 진작 가지고 나올껄. 

드르륵.  내 눈 한쪽만 먼저 들어갔는데,

“귀엽네. 세준씨 후배?” 채하연이 썬글라스를 벗고 섹시하게 웃고있다.

“왜 들어와?”

“어머…세준씨는…? 아주머니 – 저 배 고파서 왔는데, 이 사람이 괜히 구박하네요. 자기집도 아니면서?”

“어…엉…그래요. 앉아요. 내가 국수말아서 금새 내올께.”

“놔 두세요 우석 어머님. 넌. 나가 있어. 얘기 곧 끝나.”

“정말 이럴거야?”

“나가 있으라고.”

그녀는 열 받아서 숨을 세게 내 뱉었다. 
나는 이때쯤 눈 한쪽. 발 하나가 식당안에 들어와 있었는데,

“뭐야? 넌? 나 따라온거야? 싸인 해줘?”
그녀가 나를 먼저 발견했다.
순간 민우석과 윤세준도 나를 돌아보았는데.
발 한짝과 눈 한쪽을 문사이로 내놓고 있는 나의 꼴은.  수상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녀는 하물며 나 한테까지도 화가 났는지, 문사이에 끼어있는 나를 무자비하게 떠 밀고 걸어나갔다.

아!  뒤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팔랑팔랑 날개짓을 하다..
그때 하필 덜렁덜렁 거리던 문을 붙잡고 옆으로 기대며 쓰러졌는데,
우랑탕 와장창창….
하며 내 몸위로 식당문이 내려 앉았다.  

부르릉 하며 그녀의 차는 떠나갔고,
윤세준과 민우석은 놀라서 나에게로 달려왔다.

“야! 너 괜찮아?”
눈이 스르르 감겼다.
머리를 세게 부딫혔는데, 다쳤는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그냥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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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몸이 약하데요. 빈혈기도 심하고…곧 깨어난다 그랬는데요..”
“그렇구나… 젊은 애가…쯧쯔…”

누군가 문을 열고 나가고,
가물가물… 민우석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는 어디인가? 병원같지는 않은데…

눈을 떠보니 생전 처음 보는 방 안이다.
허억! 너무너무 놀라서 이불을 꽉 붙잡고 일어나 앉았는데,

“괜찮아?”
“선배님…?”
“괜찮냐고.”
머리를 더듬거렸다. 이상 무.
팔 다리도 멀쩡했고. 눈 코 입도 멀쩡하고. 아픈곳도 없고 붕대로 감은곳도 없었다.

“제가…쓰러졌어요?”
“생각 안나?”
“문떨어진거..생각 나요…아유…어쩌죠? 제가 문…새로 달아드릴께요. 제가 부쉰거죠?”
민우석이 잠시 날 골똘히 보다가.. 풋. 하고 웃더니.

“문이 문제냐? 난 너가 다친줄 알고…”
“제가 왜 여기 있어요?”
“큰 상처는 없길래, 근처에 의사선생님이 왔다 가셨는데, 그냥 잠든거라고 하시더라.”
“아…”
아휴…창피해라. 그럼 내가 민선배 집에서 지금까지 콜콜 자고있었단 말이야?

“너… 많이 피곤했어? 원래…그렇게 몸이 약해?”

민선배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예지야.”

그가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잊지 못하는데,
왜 내가 울컹. 하고 눈물이 나오려 했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미안해야지. 나를 일주일 내내 얼마나 구박했는데…
챙피주고, 성질 부리고. 소리지르고. 쫓아내고. 청소시키고. 스트레스 주고. 따라다니게 만들고…
부숴진 문이 아니라도 쓰러질 판에..

그런데 그렇게 성질 사납고 무섭기만하던 민우석이 미안하다며 마음 아파하는걸 보니…
내 맘이 이상하게 쓰렸다.

“몸이 약한게 아니구...잠이 많은거예요. 그냥. 아무데서나 잘 자거든요.”
그에게 씩씩하게 웃어보였다.

“저. 갈께요. 실례 많았습니다. 아. 그리고 문 값은 꼭…드릴께요.”

“야. 지금 새벽 두시야.”

으잉?

“네?”

“집에…연락하고. 오늘은 여기서 쉬어. 내가 하려고 했는데…연락처를 몰라서…”

나는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서울에는 나 혼자였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는 인천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하셨다.

민우석이 나가고, 둘러보니 그의 방인것 같았다.
수 많은 대본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좁았지만 깨끗하게 잘 치워져 있었다.
온돌방의 따뜻한 열기에 휩싸여 나는 체면이고. 창피고 뭐고 거짓말처럼 다시 푹…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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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얼마만인가.  이런 냄새를 맡으며 아침을 맞이하는것이…
눈을 뜨고 보니 창피한 내 현실이 나를 다시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서둘러 겉옷을 챙겨입고 나와보니
민우석과 그의 어머니는 음식을 준비하고 대화를 나누고있었다.

“저. 안녕히 계세요. 죄송합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어서 나가려는데,
“아이구. 아가씨. 어딜 간다 그래. 이리 와 앉아!”
아주머니가 날 붙잡으셨다.

“그렇게 안먹고 돌아다니니까 픽픽 쓰러지지..”

순간 식당문을 돌아봤는데, 벌써 깨끗하게 고쳐져 있었다.
“저기…저… 문 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