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일이 있고나서,
민우석은 나에게 필요이상으로 친절했다.

“한예지. 걸레질 잘 해놓고 가. 내일은 밤 새울거니까 의상실에 쉴수 있는 자리도 좀 살펴보고.
내일 쓸 소품 잘 찾아서 정리해놔.”
“저희도 같이 도울께요. 예지 혼자 어떻게 다 해요?”
민주선배가 끼어들자,

“너 정신 나갔어? 공연 일주일 남기고. 주인공 때려칠래? 니 건강 관리. 니 몸챙기는거. 최 우선이라고 했어. 안했어? 빨리 집에 가서 자고. 푹 쉬고. 내일 아침 10시에 나와. 알았어?”

“네….”
민주언니가 돌아서서는 민우석 나쁜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톡톡 쳐주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너무 고마왔고, 재미있었다.

객석에 떨어진 휴지들을 모으고, 무대에서 걸레질을 하려고 도구를 챙기러 가는데,
민우석이 먼저 챙겨 나왔다.

“가서 의상실에 쉴 자리있나. 좀 살펴 봐. 임시침대도 벽장에 있으니까 좀 깔아놓고.”

나는 우물쭈물 그의 눈치를 보다가 의상실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뒤돌아 보자 청소하는 그의 뒷 모습이 듬직해 보여 미소가 흘러나왔다.

의상실을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커다란 소파가 딱 좋아보였다. 아…여기서 쉬면… 좀 편하겠다.
싶어서 침낭을 깔아놓고,
대본을 열심히 흩어보며 소품들을 하나 하나 찾아 챙기는데,
민우석이 들어왔다.

“피곤하지?”
“예? 아…아뇨.”
“집에 가봐.”
“왜요?”
“남은 일은. 내가 하면 돼.”

“… 이렇게 도와주실 거면서..왜 저한테 시키는 척 하셨어요..?”

“내가 한다 그러면 애들이 미안해 하잖아.”

“저한테 그렇게 다 시키시면 다들 선배님이 되게 못됬는줄 알잖아요.”

“나 못된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저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의 깊은 속마음을 알것 같았다.
겉으로는 냉정한척. 못된척. 차가운 척 했지만
부원들이 부담가지지 않고, 어려워 하지 않도록 뒤에서는 배려해 주고,
작은 일까지 챙겨주는 따뜻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꼭 나한테 시키는 척 하는것은.
어쩌면 나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
착각이라도 좋았다.

나는. 민우석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니까.

민우석이 자꾸 가라고 윽박질렀지만, 나는 끝까지 소품을 챙기고, 의상실 정리를 도왔다.

“너,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걱정하는 그의 모습이 신기하고, 고마왔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그를 도왔다.

“저 안 쓰러져요. 그때 선배님 댁에서 국수먹고. 몸이 열배는 더 건강해 진것 같아요.”

민우석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점점. 더 많이 자주. 그의 웃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설레이게 했다.

청소를 마치고, 연습실을 나오는데,

“데려다 줄까?”
세삼.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역시 자신이 한말을 믿을수 없다는듯.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아요. 가까운데요. 뭐.”
“그러니까 데려다 준다는거 아냐. 멀면. 내가 미쳤냐. 이 늦은 밤중에.”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민우석도 멋적은듯 웃었는데…

걷기 시작하자.
그의 한동작 한동작이 느껴졌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걸었지만,
왠지 웃음이 터져나올것만 같은…
재미도 있고, 마음도 떨리고. 그가 무슨말을 꺼낼까… 궁금하고. 기다려지고. 설레이고…

“너.. 어디 사냐?”
“학교 근처에서 하숙해요. 저쪽에. 좀 큰 세탁소. 아세요?”
“어.”
“거기서 10분정도 걸어가면…”
“아…부모님은..?”
“엄마는 제가 일곱살때 돌아가셨구. 아빠는 인천에서 생선장사 하시구요.”
“아…그래…”
“선배님은요?”

“나? 어…. 그러니까 전에 우리 어머님은 만났고. 동생이 하나 있어. 우진이라고.”
“아. 들었어요. 그때. 근데 동생은 어디 계세요?”

“좀…멀리.”

“멀리 어디요?”

“유학갔어. 외국에.”

유학? 기대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조금마한 국수식당을 하시면서 큰아들은 대학 다니고, 둘째아들은 유학까지 보내신다니…

“아… 공부를 잘하시나 봐요?”

“공부? 그래. 공부 잘하지. 우진이. 공부하나. 참 잘 하지…바보같은 녀석이지만.”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사정이 있는것 같은데…


“왜…바보같은데요…?”

“지 주제파악을 못하는 놈이니까. 바보천치지.”

또 성질 나오나…싶어서 그의 얼굴을 빤히 보는데.

“넌 연극이 왜 좋냐?” 그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글쎄요. 현실이 싫어서?” 농담하듯 웃으며 말했다.
그가 좀 굳어진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는데,

“농담이예요. 그냥. 이런사람도 돼보고. 저런 일도 해보고. 인생 한번밖에 못사는데, 연극을 하면 여러번, 다시해볼수 있는게 많아서. 너무 좋아요.”
“연극이 현실 도피라고 생각하나?”
“아니요. 현실 직면이라고 생각해요. 모르는 인물과 부딛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인생 연습이라고 생각해요.”

민우석이 나를 보고 픽…웃었다.
“선배님은요?”
“난. 내가 할줄 아는게 그것밖에 없어서. 연극밖에 몰라서.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모든것을 바칠거라고 생각했어.”


“언제 처음 연극을 보셨는데요?”
그가 잠시 생각하고 내 얼굴을 돌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걸음 가는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고등학교때.…”
그가 좀 망설이는듯…

“그때 그 자식이 대학생이었는데...그때 처음..”
직감으로 알수있었다. 그는 윤세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것. “왜… 반말해요? 어머님은 존댓말쓰시고…”

그가 걸음을 멈췄다.
내가. 괜한말을 했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건데…

“그녀석이 싫어서.”

다행히 민우석은 나에게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잠시 숨도 못쉬는줄 알았네…
그러나 더 이상 물어보면 한대 맞을지도 몰라…

“아주 못됐어요? 선배님보다 더?”

그는 허탈한듯 웃었다.

“그래. 차라리 그놈이 못된놈 이었으면….
그런데 불공평하게도. 그놈은 착한짓만 하고. 나는 못된짓만 하지.
맘 편히 증오할수도 없게 만들었어. 그래서 그 자식이 더 싫어.”

무슨일인지…
나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을것 같진 않았지만.
이렇게 주절주절 떠드는 민우석의 모습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여기예요. 저희 집.”
“들어가라. 내일 보자.”
“고마와요 선배님.”

그는 말이 끝나자 마자 돌아서더니,  손을 한번 흔들고,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슬퍼보였다.
알수없는 고뇌가. 그를 스스로 자책하게 만드는것 같았다.
언젠가는…나에게 말해줄까? 왜 그런건지…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못보던 남자 몇명이 마당에서 왔다갔다. 뒷짐을 지고 걷고있었다.

순간 겁이 나서 심장이 덜컹 내려 앉았다.
“누구…세..요?”
“아. 아가씬. 누구지? 여기 사는 사람인가?”
“여기서…하숙하는데요.”
“이집 주인 아주머니 못 봤나?”
“아니요. 어제 아침에 잠깐…”
“뭐? 어제 아침? 어제 아침에 여기 왔었다고?”
“…네…”
“아가씨. 이름이 한예지인가?”
“네? 그걸 어떻게…”
“잠시 우리랑 가줘야겠어.”

“네? 어딜요? 당신들. 누군데요!”
“우리. 경찰에서 나왔어. 조사할게 있으니까. 잠시 가자구.”
“왜 이래요! 전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어제 아주머니 봤다면서? 협조하는게 좋을거야.”

어… 이게 어떻게 된거야?
왜….갑자기 이런일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갑자기 경찰이 와서 나를 꽉 붙잡아 차에 태우니,
떨리고 불안하고.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더 무서웠다.
소리지르는 사람들. 술에 취한 남자들. 싸움을 하고 피를 흘리는 사람들…
벌벌 떨며 주위를 살피는 내 모습이. 경찰 아저씨들에게는 많이 수상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랜시간동안 내가 알수없는 질문을 쉬지않고 해댔다.
집 주인 아주머니가 엄청난 돈을 사기치고 도망간 모양인데.
그저 한 집에서 하숙하고 있던 내가 무슨 정보가 있겠는가.
그런데 형사들은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내가 한통속이라도 되는양.
나는 대학생이고. 그냥 하숙하는 사람이라고 아무리 주장을 해도,
그들은 아주머니가 남겨놓은 증거가 있다며 나를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아가씨 신분. 증명해줄수 있는 사람 있어?”
“그럼요!”
“그럼 불러와. 증명이 되면 보내줄 테니까.”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이 늦은 밤에 누구에게. 어디로 연락을 해야하나.
분명 어제까지 가방에 들어있던 내 수첩을 찾을수 없었다.
여러 전화번호들과. 내 은행 통장 번호까지 적혀있는 수첩이었는데.
이상하다. 왜 하필 이럴때 내 수첩이 없는거지?
점점 그들은 더 수상한듯 나를 노려보았고,
급한맘에 주머니를 뒤지는데.

쪽지가 손에 잡혔다.

윤세준이 민우석 어머님께 주고 간.

그의 전화번호.
무심코 주머니에 구겨넣었던.
그 쪽지가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여보세요….”

[…누구…]
그는 잠결인듯. 피곤한 목소리였다.

“저…저기. 윤세준 선배님.”

[네. 누구시죠.]

“저기…저. 저는요.  그… 민우석 선배님 연극부에서…그때 오셨을때…쫓겨났던. 아.. 그러니까 붕어빵…”

내가 생각해도 내가 하는 소리들이 말이 안됐다.
나를 노려보고있는 형사들 앞에서 식은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는데,

[아…붕어빵…]

“기억 나세요? 저?”

전화기 너머로 그의 웃는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는데,

[무슨일이죠.]

“저기요. 제가 지금…어…그러니까. 잠깐. 뵐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