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제가 지금…어…그러니까. 잠깐. 뵐수 있을까요…?”

[….]

이상하겠지.
얼마나 이상하겠어. 자정이 넘은 시간에 생판 모르는 여자애가 잠깐 보자니. 얼마나 이상할까.


“여보세요!”  그의 침묵에 끊어졌나 싶어 다급히 전화를 움켜 쥐었다.

[거기가 어딘데.]

아…더군다나…


“겨…경….경…찰서요…”

[….]

“저기요. 선배님. 그냥 증명만 해주시면. 제가 후배라고 말씀만 해주시면...”

또 한동안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무 기가막혀서 전화를 내 팽개친걸까?

[그래. 알았어. 기다려요.]

휴우…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내가 무슨짓을 한거지? 정말 올까? 그냥 온다는 말만 하고 안오면… 그럼 나는…
그런데. 내 수첩은 어디로 간거지?
다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체…
“뭘 그렇게 찾아?”
“수첩이요. 아는사람들 전화번호랑…거기 다 있거든요..”

“아…이거?”
형사의 손에 내 수첩이 들어있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양미숙씨가 남겨놓은 증거물중의 하나야. 공교롭게도 한예지씨 은행 통장번호도 적혀있더군. 이런식으로 두 사람이 짜고 한거 아니야? 양미숙씨한테 돈을 옮길수 있도록. 이 번호를 남겨준거 아니냐고?”

“뭐 그런 말도 안돼는. 그 아주머니가 훔치신거죠! 전 그냥 피해자예요!”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고.”

한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피가 마르는 시간이었다.
이 아줌마가 잡히지 않으면 나도 꼼짝없이?
무섭고 억울해서 참는데도 눈물이 주르르 나왔다. 설마...곧 밝혀지겠지...

“안녕하십니까.”

윤세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 순간만큼은 천사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를 돌아보니, 늘 털털하던 그의 모습과는 다르게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깨끗한 셔츠에, 검정 쟈켓과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말끔한 그의 차림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인가…?

“아. 네. 이 아가씨 아십니까?” 형사들은 그를 아래위로 흩어보더니 조사분위기로 물었다.

아…이 사람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한번도 통성명을 하지 않았는데…
잠깐 잠깐씩 스치고 지나쳤을뿐 …

“한예지씨에게. 무슨일이 생겼습니까.”

휴우….

형사들은 이리저리 캐 물었고, 윤세준은 고분고분 꼬박꼬박 대답도 잘했다.
물론 대부분의 대답은 ‘모르겠습니다’ 였지만. 
내가 분명XX대학에서 학생이라는 증명과 나의 신분을 확인시켜주기에는 충분했고.
결국 윤세준은 나의 신원보증인으로 서명까지 해주어, 나는 겨우 경찰서를 빠져 나올수 있었다.

“휴………………” 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문밖을 나서고 보니.  그에게 내가. 무슨말을 해야 하나…
잘 알지도 못하는사람에게 이렇게 큰 신세를 졌으니…

“어우…참…어쩌죠…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실례가 많았구요, 정말 저도 억울했지만. 선배님께서도…정말 너무 황당하셨죠? 죄송해요. 미안해요… 다른 사람들 연락처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정말 별수 없어서…폐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잘 해결할께요.”

그는 그저 날 보고 훗…하고 웃었다.

“무서웠겠다.”

“네?”

“어쩌다가 이런일에 말려들었어?”

“…저도…모르겠어요… 하숙집에 주인 아주머니가…엄청난 일을 저지른것 같아요. 왜 제가 말려들었는지는…정말 저도 모르겠어요. 이제 곧. 다 밝혀지겠죠.…”

“우석이는…알고있나?”

“네? 아…아뇨. 선배님…전화번호. 몰라요… 수첩에 적어놨는데. 조기 저 분들이 뺏어가셔서… 죄송해요. 주머니에 윤선배님 전화번호가 갑자기 손에 잡혀서…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연락드렸어요. 죄송합니다.”

이리 저리 둘러대는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윤세준은 따뜻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잘 가라. 고생했다.”

“저. 저기요 선배님!”

윤세준이 말없이 나를 돌아봤는데,

“뭐라도...우동이라도… 사드리고 싶어요. 조기. 포장마차….”

“너. 배 고프냐?”
“…네…”

그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늘 저렇게 많이 웃어주는 사람인가. 여유가 넘쳐나는 사람같아 보였다.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않고. 침착한듯한 모습이었다.
불같은 성격에 성질급한 민우석과는 정 반대인 사람같았다. 그래서 민우석이 싫어하나?

“…나와주셔서…정말 감사해요.”
“빚 갚은건데 뭐.”
“무슨 빚이요?…”
“전에 다친건. 괜찮았어?”
“아…그때…별로 안 다쳤어요. 근데, 선배님 그 여배우랑. 친하세요?”
“아니. 잘 모르는 애야.”
“안 친한데. 왜 같이 다녀요? 더구나 그 사람은 무지 유명한데…”
“넌. 우석이랑 친해?”
“네? 어…글..쎄요. 친하다기 보단…”

그는 뭔가 알고있는 사람처럼 말없이 웃었다.
“민우석 선배님이랑… 잘 아는 사이시죠?”

윤세준이 웃음을 지우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사람도… 민우석을 싫어할까..?
서로. 증오하는 사이일까…

“그럼. 잘 알지.”

“두분이…친하세요?”
“오랫동안 알고지낸 사이야.”
그가 좀 망설이는 눈치다.  왜…

“아.. 이만 가봐야 겠다. 촬영하다 나왔거든.”
“네? 이 시간에요?”
“밤낮이 따로있는 일이 아니니까. 붕어빵은. 혼자 갈수 있겠어?”

나를 붕어빵이라고 부르는 그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실은 혼자 집으로 가는것이 너무너무 무서웠다. 아직도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을텐데…
그렇다고 이 늦은 시간에 갈데도 없었고… 우석선배의 국수집도 벌써 문을 닫았을테고..
여인숙이나 모텔로 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어찌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을뿐...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서울에 친한 친구가 아직 없었다.

 “저…구경해도 돼요?”
“응?”
“촬영장이요… 구경해도 돼요?
그가 잠시 의아한듯 나를 보는눈이.  민망하게 느껴졌지만…

“아니…솔직히.… 사실은…집에 가기가 좀 무서워서요…”

“촬영장도 무서울텐데….”
“네?”

그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무서운 영화 찍고있거든. 그래도 괜찮으면. 따라와.”

이러면 안되는줄 알면서도 나는 그를 따라갔다.
주책이라도 좋았다. 오늘 밤만은. 혼자서는 집에 못 들어갈것 같았다.
그를 따라 택시를 잡아 탔다. 너무 놀라운 일을 겪고나서인지 내 간땡이가 부은것이 분명했다. 

“연극부는 열심히 하고있지?”
“네…많이 배우고 있어요.”
“우석이가 이제 잘 해주나?”

“조금은...아. 선배님..근데요…저번에. 그 대본은… 어떤 대본 이었어요?”
“아. 그거? 몇년전에. 내가 쓴거야. 졸업작품으로 영화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전에 내가 먼지묻은 대본을 건네주었을는 그렇게 놀란듯 하더니…
이제는 충격이 가시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듯 얘기했다.

“그런데 왜 버리셨어요?”
“글쎄. 왜 버렸을까…”
“네?”
“없어져서…많이 찾았었는데...”
“그럼. 다른 사람이…버린거란 말씀이세요?”
“그랬겠지?”
“누가 그런일을?…”
“지나간 일이야. 누구든. 상관없어.”

“그럼. 졸업작품은 어떻게 하셨어요?”
“못했지.”
“졸업은요?”
“일년 더 다녔어... 덕분에 연극부에서 캡틴 해먹었잖아? 붕어빵. 궁금한게 많네?”  그는 씩 웃었다.
“아…그래서 모두들 잘 아시는군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남의 얘기하듯 그 얘기를 했지만
그 대본은 그에게 상당히 소중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대본도 대본이지만 그 안에 빼꼼히 적혀있던 노트와 메모지… 그건 다른 어떤방법으로도 대처할수 있는것이 아니니까…
졸업작품을 못해서 졸업도 일년이나 미루어 졌다니.
잃어버린 대본을 찾느라 피가 마를 일이었을텐데. 
그런 대본을 몇년이 지나서 새까마한 후배가 찾아다 줬으니…그때 그런 표정으로 뛰쳐 나간거지…
그럼 누가…그의 그 소중한 대본을 그렇게 쓰레기처럼 쳐박아 놨을까..?
윤세준은 어디서 찾았냐고, 어떻게 찿았는지도..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 왔다.” 그가 택시기사에게 돈을 주고, 시내에서 좀 동 떨어진곳으로 걸어들어갔다.

도착하니 여러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야 이 자식. 너 어디갔다 이제 와? 지금이 어떤때인데!”
영화 감독인것 같았는데 무척 화가 나 보여서 내 손발이 오그라 들었다. 미안해서 죽고싶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고개숙여 인사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 앉아있어라. 피곤하면 저기 밴안에서 좀 자고. 아침에 깨워줄테니까.”

이렇게 바쁜 와중에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와준 윤세준이란 사람은...
워낙에 착한사람이니까 그렇게까지 한게 아닐까… 나랑 특별히 친분이 있는것도 아닌데 말이다.
촬영장의 분위기는 분주했다.
배우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여러 스태프들이 조명을 조정하고, 불빛을 테스트하고… 밤을 새우며 작업을 하고 있는듯 했다.  정말 피곤하고 힘든일이겠구나…싶어 윤세준이 움직이는 모습을 주시하는데…

그는 제일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늘 그랬듯이 털털하고 편안한 커다란 쟈켓으로 갈아입었고, 방금 입었던 옷들은 소품관리하는 코디에게 건네주었다.
경찰에 잡혀있다는 나를 위해. 좀 더 믿을만한 차림을 하려고 일부러 빌려입고 온것 같았다.
그는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탭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얜 누군데 세준씨 자리에 앉아있니?”
깜짝놀라 올려다 보니 채하연이었다.
나는 그녀를 금새 알아봤지만. 그녀는 물론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저…어…”
“어디서 본것같은데. 엑스트라야? 스탭같지는 않고…”
“저. 그냥. 구경왔어요.”
“구경?  이 한밤중에 구경을 와? 넌 잠도 안자니? 잠깐. 그러고 보니…”
혹시 나를 알아본건가..

“채하연씨! 준비 다 됐습니다!”
“너. 거기 가만히 있어 봐.”

잠시 후. 감독이란 사람이 채하연과 함께 내쪽으로 걸어왔다.

“구경꾼이라고?”
“네. 근데. 이미지가 딱이예요. 그죠? 마침 잘 됐죠?”
“이미지가? 미선역에 말이지?”
그는 졸고 앉아있는 나의 얼굴을 다짜고짜 들어 올렸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는데.

“아니야. 미선역은. 아니야.”
“네? 촌스럽게 생겼잖아요! 딱 시골애같은데..”

뭐라고? 촌스러워?

“됐다. 시간없어. 오늘 촬영 밀렸어.”
“에이. 괜히 목요일까지 기다릴거 뭐 있어요. 금방 반짝 나오고 마는앤데. 그냥 쟤 시키고 오늘 접어요.”
“하긴…그건 그렇지… 어이. 이봐요. 영화 출연할 생각 있어요?”

“네?…아니요. 전..지금 그냥…”
“이만한 아르바이트도 없는데. 그냥 해 보지 않을래요?”
“뭐…뭘요?”

“감독님.”
윤세준이 나타났다. 감독과 채하연이 모두 나를 둘러싸고 모여있자 그는 조금 놀란듯 했는데.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아. 미선이 역이 오늘 빵꾸났쟎아. 5분나오고 마는거지만 중요한거라서 목요일에 다시 할라그랬는데. 하연이가 얘가 어울린다고 그냥 쓰자네?”

윤세준은 한숨을 내려쉬더니, 채하연을 노려본다. 그녀가 얄밉게 웃고.
“너. 얘 기억 안나?”
“어? 얘가 누군데? 내가 기억 해야 돼?” 채하연이 어깨를 들썩이자

윤세준은 포기한듯 감독을 바라보고.

“얘는 안돼요.”
“왜?”
“안 어울려요.”

“어울리는데.” 채 하연이 삐친 목소리로…
“아니라니까!” 윤세준이 채하연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한마디 하자,

“야. 애인인가 보다.” 감독이 낄낄대며 돌아섰다.

“어머! 감독님은! 세준씨를 뭘로 보고!” 하며 채하연도 쫓아걸어갔다.

옆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대체 미선이 역이 뭐길래…
“주인공의 돌아가신 어머니인데. 시골에서 무조건 상경한 술집 작부.  그러니까. 술집 여자죠.”

허억….  채 하연…저 나쁜 기지배…
이제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이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씩씩대느라고  잠시 정신이 번쩍났는데…
잠시 후 나는 더이상 피로를 참을 수가 없었다.

깨어보니 차 안이었다. 이불을 덮고있었는데,
아직 어둑어둑 한 새벽이었다.
그만 가봐야겠다 싶어서 일어나려는데.

“야.”

채하연이다. 같은 차안, 앞자리 에서 그녀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너. 민우석 여자친구니?”
“뭐예요?”

“아니야?”
놀란토끼처럼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내가 바라는 바이기는 하지만 무슨 소리를...

“어쨌든. 민우석 지인 이라고. 그래서 세준씨가  너한테 잘 해주는거야. 착각 하지 말라고.”
민우석 선배때문에 나한테 잘 해준다고? … 그럼. 윤세준은 민우석을 미워하지 않는가보다…오히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