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랜 사진안에는 밝게웃는 다희와. 소꼽친구였던 서정이가 웃는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서정이의 오빠였던 신준기. 준기 오빠. 참 좋은사람이었는데.
다희는 잠시 멍하니 사진만 붙잡고 서있었다.
오빠.. 요즘 어떻게 지낼까? 서정이는. 잘 지내고있을까?

연락이 끊긴지 5년이 지났다.
그래도 잊고싶지 않은 친구 서정이의 사진을 꼭 자주 손이 닿는곳에 간직해두고 싶었다.
그도 그럴것이 다희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이제 공부도 끝났고..직장도 자리가 잡혔고.
처음으로 그리운 사람이 생겼다.
이민간후에도 서정이와는 편지를 꼬박꼬박 주고받았었는데 다희가 미국에서 공부하는동안도 계속 연락이 끊이지 않았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 - 주소가 바뀌고. 이사를 몇번하고. 일에 빠져 사느라 여차저차해서 서정이의 연락처를 찾을 길이 없었다.

아니야. 이젠 할수있어. 꼭 찾아봐야지 싶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만큼 다희의 맘에 여유가 생긴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사이 그녀는 외로움을 느끼게 된것이었을까.

다음날 아침. 병원은 여느때와 같이 분주했다.

"정교수, 345호실 환자가 찾아요"
"네~" 정신없이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들 사이로 다희는 누구보다 단정하고 정리된 모습이었다. 그녀는 급할때도 뛰지 않았다. 모두들 서둘러도 그녀는 꼼꼼히 챙겨 빠뜨리고 떨어뜨리고 까먹고 하는일이 절대 없었다.

"정교수.. 오늘도 아름답네?" 이교수였다. 능글이. 정말 짜증나는 스타일인데 간호사들간에는 인기가 최고라나?
"이교수는 오늘도 한가하네?"
"언제 나의 사랑을 받아줄거야?"
"이미 받아서 다시 챙겨줬쟎아. 나. 사랑하는사람 있거든. "
"근데 그사람을 기다려야 하거든?" 이교수가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그래. 자꾸 반복하게 만들지마."
이런식으로 다희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아주 질리도록 많았다.
다희는 그런 남자들을 깨끗히 정리하는데 이제는 선수가 되어있었다.
감히 그녀 곁에 갈수없는 남자들은 그녀를 의심하기도 했다.
비밀스럽게 꼬인 유부녀? 치명적인 결점? 결벽증세?
아무렇게나 생각하라지. 다희는 그런 그들의 오해가 고맙기까지 했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밤이 늦어서야 그녀는 퇴근을 했다.
어둑어둑한 아파트 정문.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남자가 있었다.
둘은 잠시 마주보았고. 그녀는 그쪽에서 먼저 아는척하길 0.001초 정도 기다렸다.
어두워서 그런가? 분명 어제 찾아온 새신랑 민우씨였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먼저 인사를 했다. 예의니까.
민우씨는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왜저러지..? 순간 다희는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민우는 아무말없이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정말로 별일이었다. 그렇게 안봤는데... 참 예의바르고 상냥하다고 느꼈던 민우가 갑자기 싸이코로 바뀌었나?
별로 신경쓸일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럴수도 있지. 나를 못알아 봤나봐?

다음날. 그녀는 새벽녘일찍 예쁘게 단장하고 집에서 손수만든 라떼를 손에 들고 가뿐히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정문에 도착해서 걸어나오려는데,

" 아! 안녕하셔요 의사선생님!"
민우였다. 운동복 차림인걸보니 벌써부터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것같았다.
다희는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말없이 미소로 답례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민우는 소리치고 아파트 안으로 걸어들어갔고.
대꾸없이 걷던 다희는 잠시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 민우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것 참.

병원에 도착한 다희는 병원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병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정다희 선생님? 정다희씨 맞아요?"
상큼하게 미소짓고 돌아서는 다희.
"네. 누구시죠?"
뜻밖에 훤칠한 청년이 다희를 뚫어져라 보고있었다. 키가 워낙에 커서 다희가 고개를 뒤로 젖혀야 얼굴이 보일정도였다.

"나. 기억안나?"
"네?" 이런식으로 수작을 거는 남자들도 꽤 많았다. 다희는 정상을 잃지 않았다.
"준기. 서정이 오빠."
이런. 이건 정말 너무 놀랍쟎아?
"준기오빠..?"
"그래. 나. 준기야. 너가 이병원에 있다는 소식 듣고. 일부러 여기로 와봤지."
"와...정말 반갑다."
"너. 많이 컸구나"
"풋..." 웃음이 나왔다. "어른한테 많이 컸다니? 오빠야말로 많이 컸는데? 이렇게 키가 클줄. 몰랐어. 근데. 내 소식은 어떻게 들은거야? 서정이는. 서정이는 잘 지내? 정말 보고싶었는데.."
"서정이. 일본에 있어. 지금 수학과 박사학위를 거의 마쳤는데... 난. 우리 딸아이때문에 소아과를 알아보다가 우연히 너 이름을 봤고. 설마했는데... 역시 너였네."
"딸? 오빠 딸?"
"그래. 그녀석이 좀...아파."
"어느 병실이야? 누군데?"
준기는 힘없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준기를 따라 들어간 병실에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고있었다.
"이름이..?"
"민지."
다희는 준기에게 미소로 위로를 해주었다.
민지는 백혈병 환자였다.

작은커피숍에 앉은 다희와 준기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그래서. 서정이는 뭐하고 지내?"
"잘 지내지. 그렇쟎아도 너 소식. 끊어졌다고 내내 속상해 하는데. 만났다고 하면 정말 좋아할거야."
"오빠는. 오빠 와이프는 어떻게 만났어?"
"응? 어....그게.."
"왜? 말하기 곤란한거야? 그럼 괜찮아."
"그게 아니구..."
다희는 궁금해졌다.
준기는 또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먼저 보냈어"
다희의 눈이 커졌고..
"사고로..."
말을 이어갈수가 없었다.

어찌 이런 안타까운 상황이 있을수가 있을까. 와이프는 먼저 보내고. 딸은 백혈병 환자라니.
준기오빠가 너무너무  힘든시간을 보내왔구나...
"미안해 오빠. 내가 괜한 말을 꺼냈나봐."
"아니야. 항상 하는 말인걸... 너는. 너는 결혼했지? 아이는 있어?"
다희는 웃었다. 원래 하는 레파토리를 해? 에이. 준기오빠는 달라...
"아니. 결혼 안했어. 아이는 물론 없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