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기오빠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진료시간을 까맣게 잊고있었다.
"어머!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믿을수가 없었다. 완벽녀. 철저한 시간의 보수자 다희가 다른일도 아닌 진료시간을 땡치다니.
이건거의 있을수가 없는일이었다.

"미안해. 급한일이야?"
"응. 오빠. 미안해. 가봐야겠네. 근데. 이제 자주보겠지? 민지. 내가 잘 돌봐줄께."
"그래. 고마와. 어서 가봐."

급해도 뛰지않는 다희는 좀 서둘러 빠른걸음을 했다.
그녀가 진료실에 도착하자 병원은 난리아닌 난리가 벌어지고있었다.
생전 지각한적 한번없는 다희. 한번도 진료시간을 빼먹은적인 없는 다희의 지각은 실종사건으로 휘말려가고있었다.  심지어 과장님까지 땀을 뻘뻘흘리며 이게 무슨일인가 걱정으로 얼굴이 벌게지셨을정도였다.

"정교수!"
"과장님...." 그녀는 한참을 망설였다. 죄송하다는 말을 안하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완벽하려고 피땀을 흘려왔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된거야 정교수? 괜찮은거야? 어디 아팠나?" 과장님은 그녀가 그저 멍하니 시간을 잊었을거라고는 상상조차 하고있지 않았다.
"아닙니다 과장님. 제가...제가. 실수로." 더이상은 말을 이어갈수 없었다.
과장님은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래..? 뭐...정교수도 사람이니까.."
다희는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사과했다.  "잘못했습니다."
"아..뭐. 참. 우리가 괜히 놀랬나보네...  자. 어서 진료 뛰어."
"네. 죄송합니다."

오후내내 그녀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완벽한그녀에게 그날 점심때의 실수는 너무나 큰 치욕이었다.
보통사람들에게는 흔히 있는일이지만 그녀에게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허나.
이런일에 꺽어질정도로 약한그녀는 아니었다.
'그래. 정신차려야지. 내가 왜이러는지. 잘 파악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파악?
글쎄... 달라진것도 없고..특별히 신경쓰이는것도...
준기오빠가 너무 불쌍해서... 그냥 마음이 아팠고 무척 반가왔고 서정이 소식이 궁금했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골똘히 그녀는 아파트 정문에 들어섰다.
누군가 앞에서 우당탕 소리를 내며 페인트 캔을 두서너개 떨어뜨렸다.
다희는 발앞에 떨어진 캔을 하나 집어 떨어뜨린사람에게 건네주었다.
또 새신랑 민우였다.
아니 이사람은 왜 꼭 내가 출퇴근할때 보이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고, 또 이사람이 인사를 하나마나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그는 다희를 굳은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다희의 손에 잡힌 캔을 뺏다시피 채가지고 먼저 사라졌다.  매너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수는 없었다. 더구나 구면인데.
"저기 - 민우씨!"  참아야 하는데. 이런 쓸데없는일에 시간낭비할필요 없는데...
민우는 대꾸없이 사라졌다.
다희는 정말 기가 막혔다. 정말 별꼴이네. 별꼴이야...

피곤했다. 그녀는 깨끗히 씻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일부러 어제 아침 민우를 만났던 시간에 맞춰 아파트 정문을 나왔다.
이제는 일종의 실험같이 뭔가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우는 오늘역시 동네한바퀴를 벌써 뛰고 돌아오고 있었다.

"어, 안녕하셔요? 오늘도 일찍 가시네요?"
그는 또 상냥하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민우씨는 아침에만 인사를 잘 하시네요?" 다희는 참다못해 미소를 짓고 농담처럼 가볍게 내뱉었다.
"네?" 좀 당황한듯한 민우.
"뭘 놀라세요? 기억 안나세요?"
"무슨말씀이세요..?"
"어제랑 그저께랑. 저녁때 뵜을땐 아무말 없으시더니요."
"어제랑 그제요? 저녁때...뵌적 없는데요."
순간 다희는 소름이 끼쳤다. 이사람.  다중성격 있는사람아니야? 몽유병환자 인가? 아니면...
"아..." 민우가 갑자기 피식...웃었다.
더 더욱 소름이 끼쳤다. 다희는 애써 표정을 아무렇지 않은듯 보이려고 노력했다.
"저희 형을 만나셨나봐요."
"예?"
"저희 형이 여기 살거든요."
"형이요?"
"네..."
"쌍동이예요?"
"아니요..." 그는 다시 옅게 웃었다.
"그냥. 많이 닮았어요. 밤에 보셔서 더 많이 닮았을거예요. 아마."
"아...그..래요..."
다행이었다. 민우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어서. 예쁜 새색시가 잠시 걱정이 됬었는데.
"형이 좀...저랑 많이 틀려요."
"그래 보여요."
"형이 뭐 실수한거라도 있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실수는. 제가 했죠. 모르는분께 아는척을 했으니.."
말은 그렇게 했어도 속으로는 그 예의없던 민우형이 다희손에서 캔을 뺏어가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형제가 달라도 많이..다른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