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이상황. 다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희는 못마땅한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지금까지의 무덤덤하고 매너없고 불친절했던 그의 표정. 그의 이미지가 지금 다희를 바라보고있는 그의 모습에서만큼은 거짓말같이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왠지 깊이있고, 그윽해보이는 그의 눈빛. 뜻밖에 아름답던 그의 작품을 봐서였을까?

"왜..왜요?" 애써 꼿꼿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손에는 다희의 목도리가 걸쳐있었다.
다희는 말없이 목도리를 건내받았다.

"고맙네요.."
"저녁이나 먹죠?"
"네?" 다희의 눈이 똥그래졌다.
"배 안고파요?" 그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그녀에게 작업을 걸어오는 많은 남자들과는 방법이 아주 특이하지 않은가.
"이것보세요."
또 그 눈빛. 다희는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것보세요. 저는요. 알지도 못하는분이랑 식사하러 다니고. 그러지 않거든요"
"싫으면 말구요."
그는 다희를 먼저 지나쳐 걸어갔다.
다희는 또 잠시 눈을 껌뻑거렸다.
잠깐.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저사람을 거절한거지? 그런거지?  근데 왜 내가 기분이 나쁘지? 아니. 뭐. 거절하고 말것도 없지만.
다희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사람하고. 저녁을 먹고싶다.
아니. 내가 미쳤나봐. 왜이러지?
기가막혀서 다희는 큰소리로 걸으며 혼자 웃었다.  어머. 이젠 미친짓까지하네. 내가.

다희는 침착하게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잠시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는 벌써 바로 길옆 포장마차에 들어가 앉아있었다.
펄펄김이 올라가는 냄비속에 우동과 오뎅. 떡뽂이...침이 꿀꺽 넘어갔다.
먹을까? 에이...지저분하게...
그래도..맛있겠는걸?
아니야...자존심상하쟎아.
왜? 내가 뭐 저사람이랑 같이 먹는댔어? 따로앉으면 되지?
왜 내가 저사람 눈치를 보고 먹고싶은걸 참아야해? 왜?
이런저런 생각을 혼자 두런두런하던 다희는 뻔뻔스러운얼굴로 포장마차에 들어가 앉았다. 물론 그와는 좀 멀찌감치 떨어져서.

"아가씨, 이리로 와 앉아요~ 거긴 추워~~" 눈치없는 주인아주머니는 그의 옆자리에 작은방석을 깔아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아..아니요. 전 여기가 좋아요." 다희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사람이 훗.. 웃으며 다희를 돌아보았다.
"그냥 앉아요. 아까 같이 먹자고 한말. 취소할테니까."
다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말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아주머니, 저 우동한그릇만요."

우동은 정말 너무너무 맛있었다. 생각하고보니 오늘 민지생각에 마음이 저려서 점심을 못먹고 지나쳤었다.  다시 준기오빠 생각이 나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민우의 형도 배가 고팠었는지 돌아보지않고 계속 먹고있었다.

다희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날때쯤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희는 계산을 하려 아주머니쪽으로 걸어갔다.
"앗!" 다희가 팔을 늘려 돈을 전해드린답시고 옆에있는 뜨거운 물을 그의 팔에 엎질렀다.
순간 그는 뜨거움을 참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미안..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저 포장마차밖으로 나갔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다희가 쫓아나가며 물었다.
그는 대답없이 다희를 돌아보았다. 또 그 눈빛.
"준기는 왜 찾아왔어요?"
"준..기? 준기오빠랑..잘 알아요?"
"질문에 꼭 꼬리를 무는 버릇이 있군요."
"동문서답하시는건. 피차일반이네요."
그는 잠시 다희를 재밌다는듯 바라보더니 가죽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먼저 걸어갔다.
"아니, 왜 얘기를 꺼냈다가 자꾸 먼저 걸어가요?" 다희는 참다못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희자신을 지나쳐서 먼저 걷는 매너없는 남자는 정말 처음인것같았다. 다희의 말을 똑똑 짤라먹는것도 그랬다.
"말이 안통하쟎아요. 안그래요?"
"좋아요. 제가 먼저 착하게 답해드리죠. 준기오빠. 만나러 왔지 왜 찾아왔겠어요?"
"준기.. 애인이예요?"
다희는 다시 한번 당황했다.
"정말...실례되는 말씀을 서슴없이 하시네요."
"그게 왜 실례죠? 준기가 어때서요."
"아니. 그게 아니구."

그때 갑자기 민우형이 눈길을 돌렸다.
"명우야! 아직 집에 안갔어?"  준기였다.
다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준기는 조금 놀란듯했다.
"둘이...아는사이야?"
"아니." 그가 또 무덤덤히 선수를 쳤다.
"너 찾아왔다는데?"
"아... 미안해 다희야. 그런데 왠일이야?"
"그냥. 오빠 화실 구경하고싶어서. 서정이 연락처도 궁금하고."
준기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래?"
"오빠 저녁은 먹었어?"
"음. 병원에서 민지랑. 민지가 다른책이 읽고싶다고해서. 사러가는길이었어."
"길이 엇갈렸구나.." 다희는 밝게 웃었다.

"내일 보자." 명우가 지나치며 준기에게 말을 건넸다.
"아, 명우야. 잠깐."
명우가 잠시 돌아섰다.

"서로 인사안했지? 여긴 민지를 돌봐주시는 정다희선생님이셔. 어릴적부터 서정이랑 친구였고.. 이쪽은 명우. 서명우라고. 내 제일 친한 친구야."

다희와 명우는 어색하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지금까지의 티격태격한 태도와 달리 준기앞에서는 얌전히 착한 어린애들처럼 고분고분히 인사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