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우는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휴......" 어리둥절하고 정신없었지만 다희는 더이상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수없었다.
주위를 둘러볼 사이도 없었다.
그저 문이 단단히 잠귀었는지 확인을 하고는,
어디로 누웠는지. 여기가 대체 어딘지.
까맣게 잊고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덧 아침햇살이 밝게 비춰오는 아파트 거실.

철커덕.
조심스럽게 문이열렸다.
명우였다.

다희는 소파에 쓰러져 잠들어있었다.
이불이고 뭐고. 어젯밤에 걸친 코트를 그대로 입고있었다.
명우는 잠시 그녀를 돌아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옷을갈아입고.
부엌으로 들어가 이것저것을 챙기다가...
조금 이상한 듯, 명우는 다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무리 잠을 깊이자도 저렇게 우둔할수가 있나...?
소파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심히 지켜보니 다희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급히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고 그녀는 온통 불덩이였다.
"이봐요. 이봐요, 괜찮아요?"
다희는 눈을 간신히 뜨고 조금 놀래서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아...네...괜찮..." 

버티지못하고 다시 소파에 쓰러졌다.
"아니..의사라면서... 뭐 한거예요?"
"의사면....안 아픈지 아..세..요..." 다 죽어가면서도 그녀는 그에게 지고싶지않았다.
명우는 당황스러웠던지 잠시 거실을 둘러보다가, 화장실에서 타월을 적셔가지고 나왔다.

"전화...전화..."
다희는 정신이 아롱아롱했지만 병원에 전화를 걸어 못나간다고 알려야 했다.
"전화는 왜요?"
"저...병원에...전..화를..."
"엠블란스라도 불러줘요? 내가 보기에 죽을것같진 않은데..."
"저 오늘 일 못간다구요!" 다희는 소리를 빽 지르고 제 뿔에 꺽여 픽 쓰러졌다.

명우는 풋...하고 조금 웃더니 곧 전화를 꺼내 다희에게 건네주었다.
다희는 너무너무 불쾌했다. 하필 이런상황에 이렇게 앓아누운것도 기분나빴고, 이런 가여운 다희를 비웃는듯한 명우는 정말 몹시 미웠다.
분노도 잠깐...다희는 정말 힘이 쭉 빠지며 정신이 헤롱해졌다.
아..이건 분명히 기관지염이 폐렴으로 갈수도 있는 시점인데...어제 하루종일 무리. 피로. 그래서 항상 있는 앨러지가 독이된것이고 곧장 염증으로 발전하여 지금 열이 끓고있으니...사흘동안 고생좀 하다가 그래도 안 나으면 항생제를...
어쩌구 저쩌구...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희는 다시 온몸에 기력이 빠져버렸다.

다희가 다시 눈을 떴을때는 늦은 오후 시간이었다.
눈을 뜨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생소한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 아. 다행이도 옷차림은 코트 그대로였는데. 명우가 그녀를 침대로 옮겨 놓은듯했다.  침대옆을 보니 얼음물에 타올.  갖가지 약. 음. 그녀는 유심히 자기가 먹은 약들을 체크했다. 누군가 몇번 떠먹은 듯한 죽그릇도 있었다.  내가 먹었나? 기억이 없지만...그사람이 만들었나?  환자 죽 만들어 놓고 자기가 퍼먹었을리는 없고...  잠시 의아한듯 주위를 살펴보던 다희는 아직 무거운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어서 경비 아저씨한테 열쇠를 얻어 집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정문이 띵동띵동 하더니 벌컥 열렸고,
놀란 토끼마냥 거실에 얼어붙어있는 다희의 앞에 민우의 아내. 하림이가 서있었다.
하림은 잽싸게 아파트 번호를 확인하고는, 다시 의아한듯이
거실 한가운데에서 머리를 풀어헤친체 코트를 입고 서있는 다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기서...뭐 하시는거예요...?"
"아...하림씨...어..그게요..."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 상황을 극복하지 않으면 커다란 오해가 생길수도 있었다. 
다희가 어젯밤의 상황을 대강 설명하고 나자 그제야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하림씨는..왜...?"
"아...저요? 전...아주버님이 걱정이 되서..."
"명우씨가요? 왜요?"
"그게...."
"말하기 곤란하면, 안해도 돼요."

"아니요...말씀드릴께요...여쭤보고싶은것도 있거든요.."
"뭘요?" 다희는 추리극에 휘말린듯. 궁금한것이 너무 많아져서 속이 답답해졌다.
"어제 밤에...명우오빠 찾아온 사람...없었나요? 혹시...?"
"아...있었죠.  귀족같은 여자분이셨는데... 명우씨를..." 다희는 차마 말을 잇지못했는데..
"화가...나셨던가요?"
"그래 보였어요.."
하림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가 싶었다.
"저희...시어머님이셔요..."
"그럼...명우씨..어머님이시네요..?"
"아니...아..예..그런 셈이죠." 어머니면 어머니고 아니면 아니지 그런 셈은 또 뭔가? 매사에 정확하게 따지는 다희였지만 꼬치꼬치 되물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희 결혼을 심하게 반대하셨거든요...그런데 이런 일까지 생겨서...애꿎은 아주버님만..."
급기야 그녀의 커나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의 친정 아버지가...빚이 좀 많으셔서요...근데 빚쟁이들이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아주버님이 저희한테 얼른 피하라고...다른곳으로 보내셨는데...시 어머님한테 까지 얘기가 들어갔나봐요...시어머님이 화가 많이 나셨을거예요..."
"근데 왜 명우씨한테 화풀이를..."
"네?"
"아...아니예요." 따귀까지 얻어맞았다고 얘기해 주면 하림씨가 통곡이라도 할것같았다.

"항상 그런식이었어요...어머님은 언제나 아주버님께 화풀이를...하시죠... 어머. 내 정신좀봐. 죄송해요. 경비아저씨한테 열쇠 받으러 간다고 하셨죠? 제가 받아다 드릴께요. 여기 계세요. 네?"
"아..아니예요. 제가" 그제서야 식탁위에 쪽지와 열쇠가 눈에 띄었다.

다희가 가까이 가서 쪽지를 열어보니,
"병원에 연락했음.
약먹고 가서 쉬어요."
간단명료했다. 쪽지옆에는 약봉지와 다희의 아파트 열쇠가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