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쉬고난 다희는 이제 기운이 솟아나 온집안을 청소하고 상쾌하게 창문을 활짝 열고 주말의 평온함을 만끽했다.  지난 며칠간 얼마나 열이 펄펄 끓고 아팠는지. 스스로 항생재를 처방하며, 며칠 병원도 못나가고 안정과 휴식을 취한 다희는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그동안 동굴속에서 겨울잠을 잔것만 같았다.  

문득. 식탁위를 올려보니 그날. 명우가 남겨두었던 쪽지와 약봉투가 눈에 띄었다.

서 명우라는 사람...
차가워보이고.
매너 빵점에다가 인사성 없고
말하는거 아주 불친절하고
배려라는건 전혀 모를것같은 사람인데.
반면.
아픈 다희를 침대로 옮겨주고. 죽도 끓여주고. 약도 사다주고. 그것도 여분은 따로 챙겨주고.
거기다가 경비아저씨한테 열쇠까지 받아다 놔주고.
또 하림씨의 말을 들어보니
동생네 가족을 제법 챙기는것같네?
정말 인간성 최고 좋은 준기오빠랑 친하다는것도 웃기고..
서정이랑 사귀었었다는것은 더 더욱이 궁금한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또 뭐? 지수의 말로는 다희자신이랑 비슷하다고? 허 참...

따르릉..
"네. 정다희입니다. 아. 현수야!
"야! 방송해달라며! 부탁할땐 언제고 갑자기 하늘로 솟았어? 땅으로 꺼졌어?"
"어머! 그래. 내가 좀 아팠었어...어쩌니. 방송스케쥴. 내가 펑크낸거야?"
"그냥 장난친거야. 좀 어때?"
"이제 멀쩡해. 스케쥴. 어떻게 됬어?"
"병원에 연락했었다. 니가 아프다길래 내일 오후로 미뤄놨지. 어때?"
"현수야! 고마와! 내가 정말 큰거하나 쏠께~!"
"큰거 뭐? 나랑 결혼해줄래?"
"에이그.. 그럼 내일 몇시까지 가면 돼?"
"1시까지 와. 4시부터 녹화할테니까."
"고마와. 정말 고마와."

전화를 끊자마자 다희는 컴퓨터에 앉아서 골수이식에 대한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적이던 다희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다희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어머! 정교수님, 왠일이세요! 오늘은 쉬시는 날이쟎아요"
"안녕하세요 - 김선생님. 그동안 너무 놀았쟎아요. 환자들이 궁금해서요. 한바퀴 돌겠습니다."
다희는 가운을 똑바로 차려입고 이방 저방을 돌아다녔다.  면역이 약한 소아과 환자들 방에는 일부러 들어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직 아픈기운이 남았을까봐.

"다희야."
"어! 오빠!"
준기가 초췌해진 모습으로 벤치에 앉아있었다.
"미안해. 내가 며칠 못나왔어."
"미안하긴..그렇쟎아도 걱정했어. 너..몸은 나은거야?"
"응. 그럼. 나았으니까 나왔지. 환자들한테 옮으면 큰일나쟎아. 그래도. 아직은 좀 조심스럽네...그래서 민지방은 내일 들어가려구. 오빤... 잘 지낸거야?"
준기는 안색이 부쩍 나빠진 모습이었다.
"민지가...많이 안좋아졌어..."
다희는 애써 골똘히 할말을 찾아냈다. 이럴때 무답을 하는것은. 더더욱 오빠의 괴로운맘을 깊이 파고들고 마는것같아서.

"내일. 방송 내보내려구. 꼭 맞는 골수. 찾아내려고."
"넌. 의사라면서. 그렇게 거짓말 해도 돼?" 준기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 떨리고 있었다.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안타까왔다.
"전문의말로는...민지가 너무 허약해져서...생각보다 진행이 너무 빨라서...." 말을 잊지못한 준기는 고개를 숙였다.
"골수이식이...불가능하다고?" 오히려 딱딱한 목소리로 다희는 말을 이었다.
준기는 참다못해 어깨를 들썩였다.

"오빠. 나도. 알만큼은 알아. 그정도는. 전문의 아니라도 누구나 할수있는 말이고. 그치만. 나는 할수있다고 믿어. 아니. 할거야. 꼭. 성공할거야. 이러지 마. 아직 포기하지 마."
준기는 꼭 막아놨던 슬픔을 다희앞에서 몽땅 터트린듯...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채 울었다.
그의 우는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에 어루러져
다희의 가슴을 내리치듯 아픔으로 파고들었다.

다음날 오후. 다희는 똑부러지게 정장을 차려입고 방송국안에 들어섰다.
어제밤을 새우다시피 골똘히 공부해온 자료들이 손에 들려있었고, 그녀의 머리속에는 온통 민지의 상태와 치료방법등이 쉴새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다희양."
다희는 웃으며 손 흔드는 현수에게 다가갔다.
"고마와요 현수군."
"큰거 쏘는거, 잊지 않았지? 혼수는. 열쇠 셋. 알지?"
"치잇...어디로 가면돼?" 다희는 웃으며 장난꾸러기 현수의 옆구리를 쳤다.

현수를 따라 들어간 장소는 인터뷰 촬영장소였다.
다희는 분주하게 자료를 챙기고, 현수에게 이것저것 보여주며 20분간의 촬영을 꼼꼼히 준비했다.
"어, 감독님 오셨어요~" 현수가 허리굽혀 인사했다.
다희도 잠시 인사하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

"저기. 제가 말씀드린 의사분이신데요. 오늘 촬영하시러. 준비중이십니다."
그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저 사람이...감독이야?"
"응. 너. 저분 알어? 아. 여기서 전에 방송했을때 봤나?"
"화가인줄 알았더니."
"화가? 에이. 그럴리가. 저 인간이 그런 감수성이 있을리가 없지." 현수는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래? 그림. 잘 그리던데..."
"딴 사람이겠지. 저 작자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아니야. 저 사람 맞아. 서 명우."
"어...어떻게 알아?"

그때 명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준비 다 했어?"
"네에. 감독님!"
"아직 안됐어요." 다희는 현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시간 없어요. 녹화실로 오시죠."
"인사성이...아주 별로시네요."
"시간 없다고 했지요? 준비도 아직 안끝났다면서 그런거 따질때에요?"
"이거! 준기오빠 문제거든요!"
"그래서요."
"그래서요 라뇨? 친구아니예요? 철저히 준비해야죠! 그리고. 안녕하셔요. 인사하는데 천년이 걸려요 만년이 걸려요?"
명우는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는듯 하더니 곧 현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감독. 10분 줄테니까. 빨리 준비시켜서 모시고 와."

다희는 열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원래 사람이 저러니?"
"내가 뭐래. 일밖에 모르는 작자라니까. 그래도. 민지 일이라니까  시간 내준거야."
"그럼. 다 알고있었단 소리네?"
"당연하지. 감독인데. 그러니까 니가 스케쥴펑크냈어도 다시 잡아준거 아냐."

그렇지. 그사람도 다희가 앓아누운지 알았으니까.  기분이 묘했다. 
그의 불친절함이 기분나빴지만 은근히 친구를 챙기는 그의 속마음이 보이는듯 하기도 했다.
녹화내내 명우는 카메라 앞에 앉아 다희와 자료화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왠지 신경이 쓰였지만 다희는 전문가답게 깔끔하고 호소력있는 방송을 실수없이 단박에 녹화를 끝냈다.

"이야...너. 아나운서 해도 되겠다. 발음하며. 대사하며. 눈 방향. 정말 끝내주는데? 그죠 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무뚝뚝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먼저 자리를 비웠다.
다희는 상관안하듯 자료들을 챙겨들었다.
"현수야. 그럼 연락해. 나. 약속은 꼭 지키는거 알지?"
"그래. 그럼 우리부모님은 내일 만나뵈러 와."
"너 끝까지 이러면 국물도 없다."
"알았어 알았어. 내일 저녁이나 쏴 그럼."
다희는 웃으며 현수와 인사를 하고 녹화실을 빠져 나왔다.

곧장 다희는 병원으로 향해 민지를 방문하러 갔는데...민지는 실험약을 투약중이라 자리에 없었다. 돌아오면 곧 잠이 들테고... 한숨을 쉬던 다희는 돌아서서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그럼. 언제 옵니까. 아. 네." 명우도 민지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명우도 한숨을 쉬며 돌아섰는데...

다시 마주친 다희와 명우.

다희는 자신이 상상하지도 못할 한마디를 불쑥 내뱉었다.
"저녁이나 먹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