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다희는 속에서 불이 확 올라온듯 온몸이 굳었다.
그러나.
일부러 더 뻔뻔스런 표정으로 아무말 없이 다희를 마주보고 서있는 명우를 똑바로 쳐다보고 또박또박 한마디 덧붙혔다.
"아니. 너무 행복한 상상은 하실거 없어요. 그냥. 전에 신세 진것도 있고."
그는 잠시 다희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다희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시작하였다. 이 작자. 거절하기만 해봐.. 이 망할..나쁜....
"그래요. 가요. 배고픈데."

그는 다희를 휙 지나쳐서 먼저 걸어나갔다.  아니 뭐 이런...또 열받는 자신을 진정시키고, 다희는 그를 앞서가려고 걸음을 빨리 옮겼다.

드디어 다희는 그를 앞섰다. 나름 신이났는데,

"도보경주 해요?" 그의 조금 황당한 목소리.
다희는 미소를 담고 그를 휙 돌아보았다.
"전 남자 뒷꽁무니 따라잡는거. 안하거든요. 그리고 그쪽이 조금이라도 예의가 있으신 분이라면. 아니. 예의 없으신거 제가 잘 아니까 한마디 충고해드리죠. 원래. 젠틀맨은 레이디 First거든요. 알아요? Lady first?"
그는 픽 웃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더니.."뭐 먹을까요?"
"또! 말 나온김에 한마디 더 하죠. 그렇게 남의 말을 짤라먹고 화제변경하는 버릇. 아주 별로거든요?"

다희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명우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미안해요."
반전이었다.
다희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렇게 나올줄...다른남자들에겐 예상스런 일이었지만 이사람은 왠지 뜻밖이었다.
그의 표정은 다희를 두번 놀라게 했다.
무표정이었지만. 조금 심각해보이는 얼굴. 그리고 그의 눈빛.  화실에서 다희를 멈칫하게 했던 그  눈빛.

두사람은 어느새 조촐한 한식집에 마주앉아있었다.
음식을 먹는동안 둘은 내내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신후에야 다희가 말을 꺼냈다.
"감독이신지. 몰랐어요. 화가인줄 알았는데."
"화가가..되고 싶었죠."
"근데 왜?"
명우는 잠시 다희를 올려다 보았다.
"감기는 다 나은거예요?"
"또 말 바꾸시는군요. 어째 잘 나간다 했더니."
"대답하기 힘든것만 물어보네요. 그쪽이."
그는 그냥 말없이 물을 마셨다.
"화가는 왜 안하셨어요? 잘 그리시던데."
명우는 다희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고집이 세시군요."
"네." 다희는 뻔뻔스러웠다.
"돈 벌려구요. 화가는. 가난하쟎아요."
"빨간 저택. 부잣집아드님 아니예요?"
"빨간 저택?"
"저 서정이 소꼽친구라고 했쟎아요. 그 동네 살았었어요."
그의 얼굴이 확 불편해졌다.
"이만 나가죠."
"그렇게 숨길게 많아서...어디 친구하나 제대로 사귀겠어요?"
"누가 친구하제요?"
"참. 까칠한사람이네요. 오해말아요. 저야말로 No thank you거든요. 그냥 그렇단거죠."

그때. 다희의 전화가 울렸다.
"어. 오빠? 응. 왜? 아. 그래. 지금갈께."
"준기?"
다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두사람은 거침없이 택시를 잡아 타고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어두운 병원 구석진곳에서 준기가 오열하고있었다.
다희가 상황을 알아보고 있는동안. 명우는 옆에서서 말없이 준기를 지켜보기만 했다.
지칠대로 지친 준기는 넓은어깨마저 갸날퍼 보였다.
고개를 숙인채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있는 준기에게 다희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오빠! 너무 걱정하지마. 원래 실험약은... 처음엔 악화되다가 진전될수록 좋아지는수가"

말을 채 마치기 전에 준기가 다희의 손을 잡았다.

"잠시만...같이 있어줄래...? 미안해..."

다희는 조용히 손을 잡은채 그의 곁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