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희는 준기곁에 앉아서 한참을 흐느끼는 그의 옆모습을 지켜주었다.
떨어져있는 그의 고개가 안타까워서 다희는 조심스레 그의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하였다.
준기는 정신이 있는지..없는지...잠들었는지 지쳤는지..아무말 없이 다희의 어깨에 의지한채 눈을 감고있었다.
한참이 지난후에야 명우가 발길을 옮겼다.
"명우야..."
"그래. 준기야."
"다희씨...데려다줄래...?"
"오빠. 나 괜찮아. 병원이 나한테는 집이나 마찬가지야."
준기는 기운을 차리려고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 다희야. 신경쓰지말고...집으로 가. 나도 자려구 그래."
"오빠..혼자두고 싶지 않아."
준기가 힘없는 미소를 짓고 다희를 바라보았다.
"나...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마. 너가 그러는건..싫어."
"그런거 아니야. 나도 걱정이 되서.."
"다희야. 나... 민지한테 갈께. 넌. 집으로 가."
"오빠.."
갑자기 명우가 다희의 팔을 조용히 끌었다.
그리고 말없이 다희를 붙잡아 일으켰다.
다희는 당황해서 명우를 좀 노려봤는데,

"잘자라 준기야. 내일 아침에 올께."
"고맙다."

명우는 다희를 끌고가다시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준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다희는 명우의 손을 뿌리쳤다.
"왜 이래요!"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오히려 명우의 목소리가 커졌다.
"무슨 소리예요?"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앞에서 약한모습 보이는게. 죽기보다 싫은거예요. 그것도 몰라요?"
"뭐...뭐예요? 그게 무슨..?"
명우는 돌아서서 먼저 걷기 시작했다.  저 남자...또 시작이로군..
"이것봐요. 요상한 말을 꺼냈으면 마무리를 제대로 지으세요. 그리고 또. 레이디퍼스트. 벌써 까먹었어요?"
"지금이 몇신줄 알아요? 혼자 집으로 가시던지. 따라오시던지. 맘대로 해요."
"허..." 다희는 기가차서 말이 안나왔다. "저 차 가지고 왔거든요?"
"잘 됐네요. 타고와요 그럼."

다희는 신경이 날까로워졌다.
피곤하기도 했고,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 저 못된말투때문에 머리가 아플지경이었다. 
그녀는 휙 돌아서서 주차장을 향해 혼자 걸어갔다.

아. 순간 시계를 본 다희는 이미 자정이 넘어선것을 확인했다.
때마침 경비아저씨가 주차장 문을 잠그고 떠나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아저씨! 저기요!" 죽을힘을 다해 쫓아갔지만 아저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낭패가... 다희는 지친몸을 이끌고 별수없이 병원안으로 돌아 들어갔다. 이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느니...

민지 방을 빼꼼히 들여다보니 준기가 민지옆에서 쓰러져 있었다. 두손을 모으고 있었는데, 기도하는것같아 보여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문을 다시 닫았다.
다희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정교수, 왠일이야? 오늘 night floor은 내가 담당인데..?"
"그렇게 됬어. 나 쉬러왔으니까. 일시킬생각 하지마."
"여기가 호텔이냐? 쉬러오게."
"깨우기만해. 수고하세요 이교수님."

다희는 대강 씻고 비상용 락커에 넣어뒀던 병원옷으로 갈아입었다.
한시간쯤 눈을 붙혔을까...
"정교수, 정교수!"
"아....이교수...! 내가 분명히 말했을텐데...?"
"좀 도와줘. 위급해."
다희는 한숨을 푹 쉬고 일어났다. "뭔데 그래?"
"신 민지 환자. 너도 알지?"
"민지? 왜?"
다희는 이교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민지 방으로 먼저 뛰기 시작했다.
이교수는 쫓아오며 설명을 시작했다. "호흡이 위험해졌어. 실험약이 아무래도 심장쪽을 건드린것같애. 그쪽은 니가 잘 알쟎아."  
"알았어. EKG좀 부탁해. 빨리. 응급에 연락은 했지?"
민지의 방에 도착한 다희는 새파랗게 질려있는 준기와 마주쳤다. 
"오빠. 잠시만. 나가있어. 민지 나한테 맡기고." 다희는 단호한 목소리로 준기의 손을 꼭 잡았다.
준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몇시간이나 지났을까...
다희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늦은밤 이었기때문에 손이 모자랐다.
이제 겨우 민지는 정상적인 호흡을 찾아가고있었다.

"수고했어 정교수. 정교수가 없었으면 큰일날뻔했어."
"응급에선 아이들심장을 잘 모르니까.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다희는 간호사선생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방을 나왔다.
준기가 다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땀에 흠뻑젖은 다희의 얼굴, 머리카락. 지쳐서 숨이 가빠진 그녀의 모습은 그럼에도 참으로 아름다왔다. 반면. 지옥을 보고온듯한 준기의 새파란얼굴은 안색이 좋지않았다.

"다행이야. 민지. 안정을 찾은것같애. 위기는 넘겼으니까. 좀더 지켜보면"
말이 채 끝나지 전에 준기가 바람에 갈대처럼 스르륵 바닥에 쓰러졌다.
"오빠!" 

다희는 누워있는 준기의 손을 꼭잡고 놓지않았다.
링겔을 꽃고 누워있는 그의 처량한 모습은 다희의 마음을 무척이나 쓰리게 하였다.
평안하게 누워있는 준기의 모습을 보니 문득. 옛날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중학교 3학년때 쯤...
"다희야!" 도서실에서 빠져나오는 다희에게 준기오빠가 뛰어왔다.
"어! 오빠! 서정이는 오늘 일찍 갔쟎아 - 어디 간다면서?"
"갔다가. 너가 늦는다길래 데리러 왔어. 서정이가 가보라고 성화를 부려서."
싱긋 웃는 다희..."고마와. 서정이가 없어서 좀 겁 났었는데..."
"자 -- 너 배고프지?"
오빠는 주머니에서 쥐포를 꺼내들었다.
다희는 활짝웃었다.
준기와 다희는 쥐포를 뜯으며 나란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
"너...이민간다며?"
"...응..."
"언제?"
"다음달에."
"서정이가 많이 울더라."
다희도 슬퍼서 말을 잊지 못했다. 서정이와 헤어지는것만은 정말 너무 싫었었다.
"가면 꼭 편지해. 서정이. 잊지말고."
다희는 준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빠한테도...편지 해도 돼?"
준기는 잠시 좀 놀란표정이었다.
"그럼..."
다희는 피식웃고, 준기의 팔짱을 꼭 잡았다. 두사람이 걷던길은 어느덧 새 하얀 눈으로 덮이고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누군가 다희의 어깨를 톡톡...두드렸다.
"다희야..."

".....서...정이? 서정이야?"
서정이가 환하게 웃고있었다. 편지로 연락은 주고 받았었다 쳐도 이렇게 마주보는것은 정말 몇년만인가!
다희와 서정이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서정이...나의 소중한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