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카페에 마주앉은 다희와 서정.
서정이는 여전히 소녀같은 모습이었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급스럽고 예쁜옷과 악세서리로 단정히 차려입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다희는 어젯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하고, 샤워는 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인턴생활하던때와 같이 처량한 모습이었다. 아니. 인턴할때도 다희는 항상 단정했었다. 그치만 오늘은...그래도 상관없었다. 소중한 서정이와 마주 앉은것만으로 모든것이 괜찮았다.

"오빠한테 얘기듣고..금방 뛰어오고 싶었어. 널 만났다길래. 너무 기뻤어! 오빠도 너덕분에 많이 위로가 된다고 하더라.."
"서정아. 정말 기뻐! 너를 다시 볼수있어서. 준기오빠 만나서.."
"민지...잘 돌봐줘서 고마와. 어젯밤에도 너가 아니었으면 위험했다고.."
"고맙긴...난 요즘 내가 의사인것이 너무 부끄러운데.... 참! 너! 결혼했다면서?"
"응? 아...결혼..."
"행복하지?"
"오빠가...얘기 안했구나..?"
"뭘?"
순간. 서정이의 표정이 굳었다. 서정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 두 눈이 멀리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다희도 서정이의 주시하던 방향을 돌아보았는데..

명우가 커피두컵을 들고 계산을 마친 후였다. 어젯밤에 말했듯 준기를 찾아온듯했다.
돌아서던 명우도 순간 멈칫하더니 들고있던 커피하나를 떨어뜨렸다.
다희. 서정. 명우...
다희는 속으로 오호라...하며 두사람을 번갈아 보았는데...
두사람은 경직되어 움직임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명우씨! 왜 그래! 칠칠맞게!"
또 나타난 여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도 풍성한
지수였다.
"허!"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거, 서정이 아냐? 다희씨! 어머. 왠일이야. 명우. 너..."

명우는 떨어졌던 커피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돌아서서 카페를 빠져나갔다.  "야! 어디가! 같이가야지!..아...다희씨한테 물어보면 되겠구나!"
"민지때문에 다들 만나는구나~~" 지수가 호들갑스럽게 다희와 서정이쪽으로 총총 걸어왔다.
"어머! 의사선생님은 ---일 많이 하셨나봐요?"
그제서야 다희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언니...잘..지냈어요?"
"그래 얘! 너야말로...결혼해서 잘산다며? 민지보러 온거야?"
"아..네...민지보러 왔어요."
"정말 오랫만이다. 너. 명우랑...지금 처음 재회한거야?"
서정이는 멋쩍은 미소를 짓고 지수의 눈길을 피하려 애썼다.

"지수언니도 민지보러 온거죠?" 다희가 일부러 화제를 바꿨다.
"아. 다희씨! 우리 민지. 많이 아팠다면서요...준기씨가 힘들어서 어쩜좋아요..?"
"네..오빠한테 먼저 가보세요. 345호실에서..."
"준기씨가요!? 어머. 이를 어째!" 지수는 금새 안달을 하며 뒤돌아 뛰어갔다.
마음은 정말 착하고 순수하다는말이..정말 맞는 모양이었다.  준기오빠를 좋아하나?...

다희와 서정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보고 웃었다.
"다희야...너...명우씨..만났다며?"
"응? 아니..만난게 아니고. 그냥 지나치며 본거지. 그냥."
"어떤사람인지...오빠한테 들었어?"
"아니..그런얘기..할 시간이 없었어. 그냥 친한 친구라고..."
"아...그래...?"
왠지 서정이가 다희를 떠보는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너랑. 잘 아는사람이니?" 다희는 시치미를 뚝떼고 물었다.
"명우씨...명우오빠..." 서정이는 아픈 미소를 지었다.
"사랑...했어?"
서정이의 눈이 똥그래졌다.
"알고있었어?"
"지수씨가...둘이 사귀었다고..."
"죽도록...사랑했어.."
"저 사람을?" 다희는 순간 열불이 올라왔다. 아니. 저 사람이 뭐가 좋아서? 하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정말...마음 저리게 그리운사람이야.. 눈앞에 있어도."
그럴리가... "..왜..에..?" 참고있었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왜? 글쎄. 처음부터 그런건 아니었어. 워낙 차갑고 조금..거친사람이라서..."
그래. 그사람 여전하시단다.. 라는말이 하고싶었다.

"근데..오래 알고 지내다 보니까... 그 사람 진심이 보이더라...어릴때부터 숨겨왔던...여리고 착한 그사람 진짜 모습."
"왜 숨기고 살아? 생긴데로 살지않고.."
내가 보기엔 생긴데로 사는것같던데...이말도 하고싶었다.

"아픈상처가 많은사람이거든...어릴때...엄마가 돌아가셨는데...그게 명우씨를 구하려다가...어머. 내가 왜이러지. 이런얘기..너 관심없지?"
"한참 궁금하게 해놓고 관두면 못써요. 계속해."
"아니...이런얘기 해도 돼나... 명우씨가 싫어할텐데..."
"명우씨가 어찌 알겠니? 계속해봐." 드디어 추리극이 풀리나 싶었다. 그사람이 그렇게 꼬인데는 이유가 있는것일까?

"사실은...명우씨 친 어머니가 명우씨 아주 어릴때 교통사고에서 구하려다가 돌아가셨는데..그 광경을 민우가.. 아. 명우씨 동생이 다 보게됬데...그래서 그때부터 민우는 형을 증오했고... 동생이 안쓰러운 명우는 동생이라면 뭐든지 다 해주게 됬는데, 새엄마가 오시면서.. 더 나빠진거야. 새엄마는 말썽꾸러기 민우를 미워했고..형은 민우가 사고치고 다니면 자기가 한것처럼 다 뒤집어쓰고...그런식으로 지금까지 살아온거야. 덕분에 민우는 부족함 없이 잘 자랐지...형이 항상 뒷바라지를 했으니까...그런데 명우씨 자신은.  아직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것같았어...마음을 여는것도 피했고..."

그제서야 그의 외로운 뒷모습이..
사람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차가움이..
그와는 영 딴판으로 상냥했던 민우가...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림이가 했던 그의 새 어머니 이야기. 항상 그에게 화풀이를 한다던 것도 기억이 났다. 
"참 불쌍한 사람이네...어릴때 충격이 컸겠다."

"불쌍해서 좋아진건 아니야."
"그럼?"
"그 사람...알수록 끌리는 사람이라서...잊어버리는데..참 오래걸렸어."
"난..한대 콱 때려주고 싶던데.."
"미워하는것도...감정의 시작이지."
"아니 그런게 아니고.  만날때마다 인사성이... 또 매너가..."
다희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수습하느라 좀 당황했다.
서정이는 알수없는 미소를 짓고 다희에게 물었다.
"민지...깨어났을까?"
"아. 그래. 한번 가보자."
서정이와 다희는 다정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민지의 방쪽으로 걸어갔다.
민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그 앞 벤치에는 준기와 지수. 명우. 세사람 모두 나와있었다. 
명우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그를 다시 보는것이 왠지 더더욱 불편해졌다.  서정이와 명우가 재회하는 자리라면 더 더욱 끼어있고 싶지 않았다.

"아...저. 난 가서 일을 봐야겠네. 서정아. 그럼. 여기 내 전화번호가.." 다희가 종이쪽지를 꺼내 전화번호를 끄적이는데,
"다희씨! 우리 식당에서 다 같이 아침 먹어요! 다들 배고파서 질식하겠네. 이 안색들좀 봐." 지수가 소리쳤다.
명우. 준기. 다희. 서정. 네사람은 대체 어느쪽에 눈길을 두고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