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의 말을 못들은척하고 그냥 가?
그러기엔 그녀의 목소리가 기차통을 삶아먹은듯 크고 우렁찼다.

"다희야. 바쁘면 어서 가봐."
준기가 따뜻한 눈으로 다희를 쳐다보며 힘든 미소를 지었다.
오빠를 보자 온몸에 힘이 풀리듯...거짓말을 계속 이어갈수가 없었다.
오늘. 그녀는 오후근무였다.

"오빠..좀 어때?"
"난 괜찮아. 너가..피곤하겠다. 정말 수고했어. 잠도 못잤지?"
"나야...버릇이되서 이정도는 끄떡없어."
"자--자..여기서 이럴게 아니고, 어서 우리 밥좀먹어요. 네? 다희씨, 잠시만 시간 내요."
"언니가 배 되게 고픈가보네.." 서정이가 지수를 놀려줬다.

"난. 여기서 기다릴께."
어쭈. 이젠 누가 튕겨? 명우가 벤치에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민지. 깰지도 모르쟎아."
"어유...정말 나 짜증나려고 하네. 명우 너! 이런 식으로 피한다고 영 서정이 안보고 살거니? 어서 엉덩이 들고 이리오지 못해?"
모두들 할말을 잃었다. 이렇게 할말 다하고 사는 지수같은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이다.

서정. 준기. 지수.
다희. 명우.

이렇게 다섯사람은 조용히 마주 앉아 침묵하는 가운데 국밥을 떠먹었다.
지수는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준기가 자꾸 지수를 눈총주고있는 분위기였다.
지금상황에서 준기를 열받게 하는건 사람이 할짓이 아니지..싶어 지수도 입을 다문 눈치였다.
누가 이 침묵을 깨뜨려야 하는가.

"오늘 아침은 다들 출근 안하시나봐요?"
다희가 용기를 냈다.
"그러게. 남들이 보면 백수들만 모였는줄 알겠다. 헤헤헤~" 지수는 반가운듯 이내 받아쳤다.
"왜? 의사선생은 바쁘시다던데."
명우가 무덤덤하게 툭 내뱉었다.
"다들 바쁜데...괜히 나때문에.  신경쓰지말고 식사마치면 가서 할일들 해."
준기가 미안한듯 모두를 돌아보았다.
순간 나머지 네사람이 오히려 무척 미안해졌다.
"아니..아니야. 나 오늘 가게 쉬어" 지수
"오빠는...민지일인데..." 서정
"나도. 오후출근. 아...오후부터 열심히 뛰면 돼." 다희...아. 들켰다...

"미안해...그리고 고맙구."
준기의 한마디로 다시 주위는 조용해졌다.
또 다시 숫가락 젓가락 휘젖는소리만 들렸는데...

"서정아...너...결혼생활은 재밌..어?" 지수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녀 딴에는 화제를 활발하게 바꿔보려 한것이겠지만...
서정이가 아무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수저를 내려놓았고.
준기가 마음아픈듯 고개를 숙였다.
지수는 또 뜨끔해서...내가..또 뭘 잘못했나?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응. 재밌어." 서정이가 담담하게 한마디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올라가 봐야겠다. 민지 깨는거. 제일 먼저 보고싶네. 6개월만이거든."
서정이가 일어나자 준기도 수저를 내려놓았다. "나도. 올라갈께."

"그럼 우리도" 지수가 따라 일어섰다.
명우는 말없이 계속 먹고있었다.
먹고있는사람을 혼자 두고가기는 뭐하고 그렇다고 함께 앉아있기도 뭐하고..
다희는 잠시 우물쭈물 하고있었는데
"다희씨, 우리 명우 먹는데, 같이 좀 먹어줘요. 네?" 지수가 얄밉게 웃으며 준기와 서정이를 따라서 쫓아갔다.

다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국밥을 떠먹었는데..
"가고싶으면 가요." 명우가 쳐다보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쪽때문에 있는거 아니예요. 저 밤새 일하느라 배 고팠거든요."
"아까는 바쁘다고 튕기더니..혼자 더 맛있는거 먹으러 가려고 했나..? 오후 출근이니까..시간도 넉넉했겠네."
"이것 보세요."
명우는 다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참으로 깊고 맑았다. 그의 힘들고 슬픈 인생도 그 눈빛속에 숨겨진 그늘이듯.  이제는 이사람을 조금은 이해하고 싶어졌다.

"잘..주무셔서 눈동자가 참 맑으시네요." 다희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나는데로 얼렁뚱땅 뱉어버렸다.

명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풋. 하고 어이없이 웃었다.
"잘 못잤는데요...?"
"..왜 요..?"

"원래 잘 못자요."
"수면제 필요하세요?"
"의사눈에는 모두 환자로 보이나요?"
"모두는 아니고. 댁같은 분은. 좀 문제가 있어보여요."
"뭐가요."
"글쎄요. 아직은 댁을 잘 모르겠지만 필요이상으로 불친절하고 퉁명스럽다는 소리. 안들어봤어요?"
"그게 병인가요."

"병일수도 있죠."
명우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고쳐지는데요."
"글쎄요. 우선 마음가짐이 중요하죠. 세상사람들이 다 나쁜건 아니다. 좋은사람들이 더 많다. 뭐. 이런거?"
"그건 의사가 고칠수있는게 아니쟎아요."
"왜요. 꼭 의사가 고쳐야 병인가요? 의사가 못고치는병이 얼마나 많은데요?"
"별로 도움이 안돼는데요?"
"누군가에게 충고를 들으면 무조건 무시하는 경향이 있죠?"
명우는 재밌는듯 다희를 물끄러미 보고있었다.

"세상에 나혼자만 모든것을 알고있다. 내가 다 해결해야한다. 뭐. 그런 강박개념. 있지 않나요? 그래서 다른사람말은 미리미리 짤라먹고. 또 그 사람이 혹시 좋아질까봐 미리미리 피하고. 그러는거 아니예요?"
"좋아질까봐?"
"그래요. 사람을 무시하는척 하지만. 사실은 피하는거 아니예요?"
다희는 실험중 대단한 결과를 발견한 사람처럼 자랑스럽게 자신의 목적을 향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누가 누굴 피한다는거예요?"
"글쎄요. 누구든 가까이 다가오는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발로 차버리고. 될수있는한 못된말과 미운행동으로 상대방이 먼저 질려서 떨어져나가길 기대하는거 아니예요?"
명우는 눈을 내리뜨며 훗...하고 웃었다.  그의 미소가 왠지 가슴을 꾹 찌르는것같이. 조금 아파보였다. 아. 내가 너무 많이 떠들었나?

그때 다희의 핸드폰이 울렸고.
"응. 그래. 민지가? 아..." 다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이교수. 지금 올라갈께."
명우가 기다리듯이 다희를 올려보았다.
다희는 밝게 웃었다.
"고비는 넘긴것같아요. 이제 약이 제대로 작용하기 시작했데요.  원래 실험약이 위험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해보는 이유는. 바로 이런 행운이 올수도 있기때문이거든요. 이제 서서히 치료되기 시작하면. 수술도 가능해 질거예요. 딱 들어맞는 골수만 찾을수있다면.."  다희의 얼굴에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얘기를 듣던 명우도 다희가 보기에는 처음으로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게...저사람의 본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