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가 힘없는 미소로 다섯사람을 맞아주었다.
준기는 너무나 밝아진표정으로 기뻐하며 민지의 손을 꼭 잡았고
민지는 아직 말은 할수없었지만 오랫만에 만난 서정고모쪽으로 눈길을 주시하고있었다.
서정이는 눈물이 글썽하여 민지의 이마에 조용히 뽀뽀해주고 가까이 옆에 앉았다. 지수도 눈물맺힌눈으로 웃으며 준기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고,
뒤늦게 도착한 명우와 다희도 흐믓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희는 이내 차트를 꼼꼼히 챙겨보았고, 간호원,  이교수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웃는얼굴로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방을 나왔다.
"다희야!"
서정이가 급하게 쫓아나왔다.
"고마와..."
"고맙긴 -- 그건 내가 한게 아닌데?" 다희는 하늘을 가르키며 말했다.
삶과 죽음에 길에서 의사가 할수있는일의 한계를 다희는 너무나 가까이 체험해왔다.
"나 금방 나갔다올께. 오늘은 오후부터 밤까지 쭉 병원에 있을거니까."

서정이가 웃으며 다희를 보냈다. 돌아서서 걷다가 순간 조금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서정이와 명우... 무슨얘기를 할까? 대화를 나누기나 할지...이미 결혼해서 떠나버린 서정이지만...또 서정이 말로는 자기만 좋아했다지만.. 두사람의 과거는 도대체 어떤것이었길래...? 아니지. 내가 상관할바가... 그런데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내가 방을 나올때 명우는 어느쪽에 눈길을 주고있었더라?  다희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우려는듯 고개를 흔들었다.

오후내내 병원일은 눈코뜰새없이 바빴다.
간간이 민지의 소식을 듣는 즐거움으로 다희는 피곤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다.
민지는 일시적인 부작용으로 인한 위험고비를 넘기고, 이제는 실험약에 상당히 호응적인 반응을 보이며 시간이 더할수록 생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딱 맞는 골수를 찾는일이 급선무였다. 그래도 방송이 나간이후로 검사를 받으러 오는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출근한지 40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다희는 집으로 돌아갈수있었다.
피곤한몸으로 아파트안에 들어선 다희는 샤워를 하고 편한옷으로 갈아입은후 잠시 TV앞에 앉았다. 원래 너무 피곤하면 잠이 잘 오지않아서 마음을 좀 안정시킬 참이었다.

띵동띵동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시계를 보니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는데..
'아니 이시간에 누가..?'
다희는 황당하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해서 아예모른척 자는척 앉아있을까..하다가
끊어지지않는 벨소리에 의아해서 스크린쪽으로 향해 갔다.
새파랗게 질려있는 하림이었다.
다희는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

"아..계셨네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좀.. 도와주세요! 아주버님이.."
"네? 왜그래요?"
하림은 울음을 터뜨렸다.
"다치셨어요!
"어떻게..."
"죄송해요 -- 피를 많이 흘리셔요..너무 겁이나서...여기로 뛰어왔어요. 죄송해요.." 이야기 하는동안에도 하림은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모습이 많이 흐트러져 있는걸보니 무슨일이 생긴것이 분명했다.

"하림씨는..안다쳤어요?"
그제야 하림의 얼굴과 팔에도 상처가 보였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래요. 어디로 가면 돼요? 어서 가요." 다희는 서둘러 비상 의약품을 챙겨 들었다.

명우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현관 입구에서부터 명우가 쓰러져있는 소파까지 핏자국이 이어져있었다. 다희는 침착하게 명우에게 다가가 섰고, 명우는 정신이 들었는지 아닌건지.. 천천히 눈을 뜨고 다희를 보고는, 놀라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왜.."
다희는 그의 입을 손가락으로 눌러 정지시켰다.

여기저기 자세히 살펴본 다희는 명우의 이마에 쉴새없이 흐르는 피.  터진입술쪽의 상처. 눈가의 찢어진 상처. 그리고 보이지는 않았지만 온몸으로 타박상이 심각한것을 한눈에 알아챘다.
"별거 아니네요." 다희는 담담하게 명우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명우는 한숨을 쉬는지. ..신음이었는지..그런 비슷한 휴...소리를 뿜어내었다.

"괜찮으신건가요?" 하림이 급하게 다가와 물었고,
다희는 아무말 없이 의약통을 열어 소독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자르기 시작했다.
"뭣하러.."
다희는 다시 명우의 입술을 정지시켰다.
"운좋은줄이나 알아요. 이런꼴로 병원가려면 엄청 쪽팔렸을텐데." 

명우는 기가찬듯 한숨을 쉬다가 - 소독약을 쓱쓱 문지르는 다희의 무자비한 손길에 얼굴을 찡그렸고... 다희는 우선 이마에 출혈을 막아놓았다. "위에 옷좀 벗어볼래요?"
"싫은데요."
"명령인데요. 어린애예요? 싫다니."
"됐어요. 와주셔서 고마운데요. 이제 그만 가시죠. 제수씨도 가봐요." 명우는 다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다희는 열받은 표정으로 후..하고 앞머리를 휘날렸다. 대체 왜이렇게 엉망이 된건지...왜 말안듣고 뻐튕기는지. 물어보려하는 찰라에.. 또 요란한 벨소리가 들렸는데,

하림이 멈칫하다가 뛰어가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뚜벅뚜벅 들어오더니 "짝!" 하고 하림의 뺨을 치는 여인이 있었으니..
"어머니...여긴..어떻게.."
명우의 어머니는 하림의 다른 한뺨을 한번 더 쳤다.
그때 명우가 어디서 힘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 하림을 막고 어머니 앞에섰다.
명우를 위아래로 흝어보더니 여인은 무서운눈으로 명우를 노려봤다.
"왜 이러세요."
"왜 이러냐구? 니가 몰라서 물어!" 여인은 명우의 상처난 얼굴에 대고 서슴없이 또 한대 갈겼다.
다희는 멍하니 이광경을 보다가 발견되는 즉시 자신도 한대 얻어맞을것같아 죽은듯이 자리에 꼼짝안하고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