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우의 어머니는 가방에서 두터운 봉투하나를 꺼내 바닥에 개뼈다귀 던지듯 휙 떨어뜨렸다.
"그놈들이 우리집까지 왔었어!"

이런얘기 할 상황은 아니지만 자세히 보니 명우의 어머니라는 여인은 절세미인이었다. 나이도 꽤 젊어보였고 꾸민모습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피부나 몸매가 귀족의품새 그 자체였다. 근데 하는짓은 영 깡패같아서..

"액수가 적지않아서 나도 시간이 좀 걸렸어. 당장 해결해! 그 더러운놈들이 우리 집까지 찾아오게 만들다니! 내가 왜 이런 추잡한일에 엮여야 돼! 왜!" 소리지르는 그 모습은 히스테리 그 자체였다.
하림은 하염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쪼그라든듯 앉아서 울고있었다.

"제가 해결한다고 했잖아요. 돌아가세요. 저것도. 다시 가져가세요."
"니가 해결해? 전에 니가 한말이 그거 아니었니? 그래서 그놈들이 내 집까지 들썩이게 만들어? 니꼴은 또 이게 뭐야?"
"...죄송해요. 어머니. 죄송해요...아주버님은 -- 그리고 민우씨는 아무 잘못없잖아요..다...저때문이예요.." 하림이 뛰어들어 울부짖었다.

"왜 잘못이 없어? 너같은걸 집에 들여놓은게 잘못이지! 민우 중국에 출장갔다며? 잘 됐어. 이번기회에 너도 중국으로 가.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고! 니 친정아버지는 한번만 더 근처에 얼씬거리면 감옥으로 보내버릴테니까."

"그만해요!" 명우의 화난모습...다희까지 움찔했다.
"그렇게 보기싫으면 어머니가 가시죠? 안보이는 곳으로, 당신이 가시라구요!"
"이게 어디서!"
여인은 또 열불난 표정으로 손찌검을 하려는지 가방을 든채로 손을 치켜들었다.
"잠깐!"
다희가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튕겨 서서 모두앞에 나타났다.

잠시 모든사람들이 얼음놀이를하듯 그자리에서 굳어버렸는데... 그 순간까지는 아무도 다희가 그 자리에 있다는것을 기억한 사람이 없었던것 같았다.

"자꾸 이러시면 곤란해요."
"뭐지 - 당신은?" 명우 어머니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다희가 튀어나오자 확연히 당황스러워 했다.
"왼쪽입술이 벌써 여러번 터졌거든요. 자꾸 이러시면 지혈이 안돼서 곤란해요. 치시려면 오른쪽으로 치시죠."

명우의 어머니는 기가막힌 얼굴로 다희를 노려보고 눈쌀을 찌푸렸다.
"다희씨. 이만 가봐요." 명우가 한숨쉬듯이 나지막히 말했고,
"아니요. 전 하던 치료. 마저하고 가려구요." 어디서 배짱이 생겼는지, 다희도 물러나고 싶지않았다. 내심. 이러다 나도 한대 맞는게 아닐까...걱정이 되긴했다.
"치료?" 명우 어머니는 다희를 이상한눈으로 눈여겨보았다.
"이사람. 많이 다친거. 안보이세요?"
그때 다시 하림이 뛰어들어 어머니를 붙잡았다.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다시는. 이런일 없을거예요. 제발. 민우씨한테는...떠나라는말씀..하지 말아주세요.."
"내일 집으로 와!"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남기고 돌아섰다.

명우가 빠르게 바닥에 떨어졌던 돈봉투를 집어올리고 어머니의 팔목을 잡았는데,
심히 불쾌하게 돌아보는 그녀의 손에, 돈봉투를 쥐어 주었다.
"건방떨지마. 이런돈을 니가 어디서"

"아파트 처분했어요. 가져가요."
어머니는 명우를 쏘아보더니 비웃듯 썩은미소를 짓고, 돌아서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명우는 비틀거리며 벽에 쓰러지듯 기대섰는데...
"괜찮아요?" 다희가 다가섰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있었다. 
"쓰러지기 전에 어서 누워요." 다희는 그를 부축하여 소파로 옮겨갔다. 울던 하림이 얼른 거들었다.

기진맥진해서 쓰러져있는 명우를 다희는 정성스럽게 치료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런말도 하지않았다. 궁금한것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지금 그녀의 침묵은. 명우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하림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뭐. 사실 묻지않아도 대강 짐작이 갔다. 빚쟁이들이 깡패들을 고용했던지. 사채업자들이던지. 하여튼 하림이 친정아버지가 진빚때문에 하림을 보호해주려다가 명우가 몰매를 맞았을터이고.  민우는 외국에 출장을 나가있으니 어쩔줄모르던 차에 하림은 의사이기도 하고 조금은 안면도 있는 다희를 찾았을것이고... 명우의 새어머니는 이 추잡스러운 상황을 불러온 못마땅한 며느리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것이고...그래도 그분...완전 조폭이더군...강적이야...

말없이 명우를 치료하던 다희는 가차없이 명우의 윗도리를 치켜 올렸다.
짧은 신음과 함께 명우가 눈을 가늘게 떴는데..
역시나 그의 몸통은 엉망으로 망가져있었다. 다희는 그의 갈비뼈몇을 꾹꾹 눌러보았는데,
명우는 참지못하고 신음을 토해냈다.
"부러졌네요...속으로 터진건 없는것같고.. 몇달 고생좀 해야되겠네."
"참..친절하시네요.." 힘없는 목소리였다.
"바보 아니예요?"
명우는 다희를 지친눈으로 쳐다보았고..

"뭐가 잘났다고 이렇게 망가진사람이 제발로 걸어온 의사한테 집에 가래요? 밤새 피 질질 흘리고 여기 누워있을 생각이었나 보죠?"

"....그때 갔으면 좋았잖아요."
"좋긴 뭐가 좋아요? 지혈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이렇게 사방으로 찢어져서 24시간이상 방치해두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구요!"
명우는 열받아서 화를 내는 다희를 물끄러미 보고만있었다.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그의 반응이 없자, 다희도 잠시 멀뚱멀뚱 명우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정말...감사드려요..죄송하구요.."
그제야 눈이 퉁퉁 부은 하림이 입을 열었다.
"하림씨.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도울수있다는게. 다행이잖아요. 하림씨도 어서 가서 쉬세요..그리고.."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다희는 용기를 냈다.
"절대로 주눅들지 말고. 용기를 내요. 민우씨가 있잖아요.."

"죄송해요...선생님께 이런모습 다 보여드려서..너무 죄송해요.
아주버님께도...정말 할말이 없어요..."

"집에 가요. 그리고 내일...어머니한테.. 혼자 가지말고."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주버님. 아파트얘기..정말이예요?"
".....신경쓸거 없어요. 어차피 이사하려고 했으니까."
하림이 다시 풀이죽어 고개를 숙였다.

"부탁이 있어요." 명우의 목소리에 다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는데...
그의 눈빛이 진실함으로 투명해보였다.
"제수씨좀...데려다 줄래요.."
너무나 상심하고있는 하림이 무척 걱정이 되었는지, 명우가 처음으로 한 그 부탁은, 다희를 왠지 뿌듯하고 흐뭇하게 만들었다. 그가 다희자신을 믿고 의지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을까...

다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하림의 손을 잡아주었다.  하림도 명우의 배려가 고맙고 다희의 친절에 못이겨서 수줍게 미소를 띈채 다희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명우를 뒤로하고 나오다가...다희는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현관에 보이는 종이와 펜을 집어들곤 급히 끄적이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무슨일있으면. 전화해요. 구토를 한다던가. 열이 난다던가."
다희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써놓고, 그와 눈이 마주치지않으려고 재빨리 문을 닫았다.


"선생님...고마와요." 하림은 고맙다는말을 백번쯤은 되풀이했다.
다희는 하림의 손을 꼭 붙잡아주고, 편히 쉬라는말을 몇번이고 되풀이하고,
그제서야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얼마만에 누워보는 침대란 말인가. 그런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않았다.

서명우.
그의 상처난 얼굴이 머리속을 떠나가지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영화의 장면처럼 계속 반복되었고, 알수없는 이유의 떨림이 다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느낌이 무었인지. 연애한번 해보지 않은 다희가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그녀는 강력히 부인하던 자신의생각에 수긍하기 시작했다.
내가...서명우를...좋아하는건가...? 동정하는건가?
미쳤지..내가 왜...
왜...? 좋아하면...왜 안돼는데? 그 사람이 불쌍해서? 그건 아니야.  그렇게 측은하게 느껴질만큼 착하고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데? 또 만약에...그 조폭이 시어머니가 된다면...
으흑. 끔찍한 생각까지 다다른 다희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양한마리..양두마리...양세마리...
억지로 상상하며 다희는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