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도착하니 명우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집앞이라더니, 어디간거야?
서둘러 들어가보니 다희 집앞 계단에 그가 걸터 앉아있었다.

다희는 이 상황이 어떤상황인지 헷갈려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왠일이야? 저 인간이 전화를 다 하고...?
명우가 다희를 올려다 봤는데...
안색이 많이 좋지 않았다. 얼굴은 어제 다친 상처 그대로..또 다친것같진 않았는데..

"아픈거예요? 약은 먹었죠?"
"......"
"어디. 열나요?" 다희는 얼른 그의 이마를 짚으려는데, 명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가 곧 스르르 풀어놓았다.
"그런건 아니구요."
"왜 그래요? 무슨일 있었어요?"
명우가 피식 웃었다.
"오늘은. 그냥 내 맘대로 하고싶은데. 그래도 돼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의 부드러워진 표정도. 행동도. 다희의 심장을 마구 두드려댔다. 왜 심장이 뛰고 난리인지. 다희자신도 알수없었다.

"무슨..말이예요?"
"그냥. 하고싶은말도 다 하고. 보고싶은 사람도 보고. 그러고 싶어서요."
다희는 그의 곁에 가 앉았다. "하고싶은말. 보고싶은사람. 그거 매일매일 해도 되는거예요. 오늘만이 아니고."
명우는 다시 힘없이 웃었다.
다희는 기다리듯 그를 보았다.
"하고싶은말이..뭔데요? 누가...보고싶은데요..?"
대답없이 다희를 돌아보는그의 눈동자가 다희의 눈동자와 정확히 마주보고있었다. 그의 눈동자속에 다희의 얼굴이 보일정도로. 그렇게 맑고 그윽한 눈속으로 다희는 빨려들어가는 자신을 막을길이 없었다.

"아주 어릴적부터...지금까지...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지 않으려고..노력했어요.  나는. 나쁜놈이니까. 나는. 잘못한게 너무 많아서...행복할 자격이 없으니까...
"........."
"나때문에...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민우가 어린나이에 큰 충격을 받았고...새어머니가 일년도 채 안되서 오셨는데...그분은..처음엔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귀찮아하시고. 미워하셨죠...민우는...참...어린아이였는데..."

이미 알고있었던 얘기였지만 명우에게 직접 들으니 더욱 가슴이 미어지는것같았다. 이 사람이 왜 이러는걸까..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해주고 있을까...?
"왜 그렇게 생각해요 -- 명우씨 때문이라고? 어떤 사고였는지 몰라도 살고 죽는것은 사람이 결정하는게 아니예요. 명우씨가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라고 어머니께서 희생하신건 아니잖아요. 민우씨가 명우씨를 원망하는것도. 틀린거예요. 어린아이였으니까 이해를 못했을수도 있죠. 하지만 잘못된 생각은 고쳐야하는거 아닌가요?" 뭔가 위로의 말로 토닥거려주고 싶었는데, 결국은 늘 하는데로 나무라는듯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래요...우리도 알고있어요. 그래도 살아온 방식을 고친다는건. 쉽지 않은일이죠."
"바보로군요... 그렇게 자책하면서 사는건. 바보같은거예요. 실수는 누구나 하는것이고..더군다나 어릴때의 환경은 우리의 손에 달린것이 아닌데..."
명우는 다시 피식 웃었다.

"근데 오늘은...왜 하고싶은데로 하는데요?"  다희가 그를 돌아보며 무척이나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일. 잊어줄래요? 내 입으로 이런말 하는거. 태어나서 처음이니까..."
또 동문서답...이사람 여전하네..
명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사가요. 이제 마주치지 않을테니까...가끔 뵙겠죠. 그럼. 들어가시죠."

"이봐요!"
다희는 조금 화난 목소리로 그를 노려봤다.
"혼자 김치국마시고 떡먹고 다했으니까 이만 가보신다구요? 왜 항상 그렇게 제멋대로죠?"
명우는 물끄러미 다희를 보고 서있었다.
"묻는말에 대답도 안하고. 또...내 얘기는. 하나도 안했는데."
명우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다희를 쳐다 보았다.
다희는 아무말 없이 아파트 키를 꺼내서 집문을 열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명우에게 들어오라는듯이 기다렸다.

다희는 커피를 들고 명우앞에 내려놓았고. 집안 소파에 두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왜그런지...어색하지 않았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냥 느낌이 꽉차고 따뜻한 기분이었다.
"난 말이예요.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사랑도 한번도 안해봤거든요. 어릴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랐고. 뭐든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받아서.. 항상 제가 잘났는줄 알았거든요... 근데. "
명우가 다희를 보고있었다.

"의사가 되고. 제 품안에서 내 환자들이 사라져갔어요. 소아과라서...더 마음이 아프죠. 병이 나아서 퇴원하는 아이들..또는 병을 끝내 이기지 못한 아이들...그 모습들을 보면서. 점점 내가 얼마나 힘없고 나약한사람인지를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느껴질때면... 제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정말 추운겨울에 혼자 먼길을 걷는것처럼.  예전엔 혼자있는게 좋았는데. 이젠 싫어요."

명우는 말없이 눈길을 돌렸다. 뭔가를 생각하듯이.
"명우씨. 저랑 친구 할래요?"
명우는 조금 미소를 담고 다희를 돌아보았다.
"친구?"
다희가 활짝웃었다. "네. 친구."
"글쎄요... 잘 나가는 의사와 백수가...친구가 될수있나요?"
"백수..라뇨?"
"오늘부터 백수거든요."
"네? 그럼...방송국..."
명우는 대답대신 힘없는 미소로 답했다. 상처난 그의 얼굴이 안스러웠는데...직장까지..
"왜요? 혹시...깡패들이 방송국에도 찾아갔나요?"
명우는 재밌다는듯 웃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아니...그러니까...깡패들이 왜 그러는데요?"
"빚이 많았어요. 아파트 처리하고도. 아주 더 많이요. 시간이 좀 오래 걸렸는데...사채업자들이 기다리는걸 잘 못하더라구요.."
"아직도...못 갚았어요?  명우씨가 진빚도 아니라면서요."
"오늘 다 끝냈죠. 그래서...마음이 편해요."
"아니...그럼 뭐...끝난일을 가지고 직장에서 짤리고 그래요?"
"제가 관둔거예요."
"왜요?"
"이제는...내가 하고싶은데로 살고싶어서."
다희가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명우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희를 물끄러미 보고 물었다.
"어제...놀랬어요?"
또 화제 바꾸기 시작하네 이사람...너무 인터뷰하는것처럼 많이 물어본것 같아서 다희도 수긍하기로 했다.
"아니..뭐...조금..그럴만도 하다 싶었어요."
"그래요?"
"다들 속상하니까...근데...젊으실때 한주먹 하셨겠어요. 명우씨 어머니.."
"그랬죠...젊으실땐 더하셨죠..." 명우는 훗...하고 웃었다.
"화해...했어요...?"
"화해?...그분은..그런거없어요. 또 가서 한참 혼나고 왔는데요."
"하림씨는요?"
"친정에.. 보냈어요."
오라고 한 며느리를 빼돌려 보냈으니...조폭여사가 얼마나 또 화를 냈을지 상상이 갔다. 
"왜 그러고 살아요? 다 큰사람이 어머니한테 혼이나 나고...딴때는 혼자 잘난척만 되게 하더니.."
명우가 허탈한..소리없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이사람이 자주웃네...? 혹시...약기운에 부작용이 겹쳐서 머리에 이상이 생겼나..?

다희는 혹시나해서 명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슬픈 눈가가. 그의 공허한 미소가.  뭔가 무엇을 바라보는 외로운 눈빛이.
그 순간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다왔다.
"왜...그렇게 자꾸 아파하냐구요..." 다희도 모르게 그말이 흘러나왔다.
명우가 다희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불쌍해요?"
"그럼. 백수에. 몰매나 맞고 다니고. 된통 혼나서 힘빠져있는 사람이. 불쌍하지 안 불쌍해요?"
명우가 다시 웃었다. "그렇네...정말 불쌍하겠네..."
다희가 잠시 할말을 찾고있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방해했네요. 피곤할텐데, 어서 쉬어요."

"화 ... 났어요..?"
그가 픽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럼. 이만.."
"저기요."
다희가 조금 망설였다.
"다음에 만나도...하고싶은데로...하실거예요...? 아님...그 전처럼 뭐든 숨기고...피하고...그러실거예요..?"
"다음에. 만나면. 만나게 된다면. 그때 말해드릴께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명우가 잠시 다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흘러내린 옆머리가 다희의 시야를 약간 가리고 있었는데...명우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잘 자요. 그리고...고마왔어요."
다희는 심장이 멎는것 같았다. 그의 작은 손동작 하나로 평생 쌓아온 철저하고도 완벽한 그녀의 차가운 벽이 우당탕 꽝...하고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돌아서는 모습이, 한초 한초지나가는 그 짧은 시간이 아까왔다. 오늘밤이 지나면 그의 다정스러움이 온통 모두 사라지고 예전의 퉁명스런 모습으로 돌아올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을까.. 이 밤은 왠지 그가 여린 속모습 그대로를 다 들어내 보여준... 그의 진실한 모습이었고.  
"명우씨!"
왠지 지금을 놓치면 영영 다시는 안돌아올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나랑...친구 안할거예요?"
"친구는. 준기하나로 족해요."
"그럼. 난 뭐예요?"
"의사잖아요."
"당신한테 뭐냐구요."
"....의사요."
"지금 장난쳐요?"
"나를...처음으로 고쳐준 사람이예요. 처음으로. 치료받고 싶었어요."
다희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건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왜 이사람은 나를 꼼짝못하게 만드는거지?
명우가 돌아서서 걸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다가 다희는 그자리에 스르륵..아이스크림 녹듯이 풀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