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우..그가 걸어나간 후에 한참동안 다희는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저사람이...좋아진건가...
그럴리가. 내가 너무 외로와서 잠시 정신을 놓은게지. 난. 그런거 너무 귀찮아서 싫은데.
다희는 애써 합리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허탈한 미소가 머리속에서 빙빙도는것은 어쩔수가 없었는데... 아...내가...너무 착해서 그래. 다친사람이 힘들어하니까 자꾸 걸리는거야. 아. 맞아. 하하하...
그러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그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자...다시 심장이 멎는것같았다.
다희는 침을 꿀꺽 넘기고...두근대는 가슴을 정리하려 애썼는데...

그 후로 며칠간 다희는 바쁜 일정을 보냈다. 아파트에도 잠깐잠깐 샤워하러 들렀을뿐, 의사협회 모임이다 이런저런 회의, 또 컨퍼런스다 해서 정신이 없었다. 내내 명우가 궁금했지만 다희는 오히려 잘됐다..싶었다. 내가 잠시 나사가 빠졌던거라면..그래. 이런식으로 깨끗히 지워지겠지. 내가 무슨 그런사람을.. 우하하하...

아니었다.
그의 얼굴이, 그의 몸짓이, 그의 표정이 더욱더 선명하게 다희의 가슴을 뛰게했다. 보고싶었다. 그렇게 짜증났던 그의 지나쳐 걷는 뒷모습도. 그리웠다.

"다희야, 뭐해, 여기서?" 잠시 멍하니 커피를 들고있는 다희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치고 옆에섰다.
"어..오빠. 오랫만이네.."
"그래. 바빴다면서"
"응. 오늘 처음으로 숨돌리네...참. 민지, 수술 잡혔지? 정말 기적같이 희망적인 케이스고..잘 될거야. 알지?"
준기는 기대에 가득찬...희망이 다시 살아난듯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 웃는거...보기좋다.  참. 서정이도. 잘 있는거야? 아직 할얘기가 많은데 그동안 너무 바빴네.."
"그래. 서정이도 너 보고싶어서 안달이더라."
다희가 활짝 웃었다...그래..나에겐 친구가 필요한거야. 그런거야.
"명우얘기.."
심장이 펄쩍 뛰었다.
"으응...?"
"명우얘기...들었..어?"
"무슨..?"
"일 관뒀다던데...아파트도 처분하고."
아...다 아는얘기여서 다희는 실망스런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상관할 일이..아닌데..?" 
"아...그래..?"

"어디로 이사했는데?"
앞뒤가 맞지않는 다희의 질문에 준기가 풋하고 웃었다.

"상관...안한다면서?"
"응. 아니. 돈도 없는사람이 백수가 되면...어떤곳에서들 사는지..궁금해서."
"너...명우가 돈 없는건 어떻게 알아..?"
"아유. 그냥 그렇게 됐어. 나도 어쩌다 휘말려서 이것저것 줏어들었네.. 관심 끊어야지. 참. 오빠, 요즘 일은 한참 못했겠네?" 얼렁뚱땅 다희는 몽땅 말아먹고 화제를 바꿔버렸다...자신도 명우의 동문서답을 닮아가는지...
"응...학교에서 다시 연락이 오긴했는데...아직은 민지가..."
"미술대 교수자리 말이지?"
"응. 서두르고 싶지 않아."
다희는 흐믓한 미소로 준기를 바라보았다.
"오빠는...여전해."
"뭐가?"
"뭐든 여유있고. 편안하고. 침착하고..."
"다희야."
"응?"
"너...기억나니..너..이민가기전.."
"우리 마지막 만났었던 날?"
"...그래."
"그럼. 기억나지. 그때 오빠랑 나랑 쥐포먹으면서.. 오빠가 나 집에 데려다 줬잖아."
"아니. 그날 말고."
"응? 또 있었나...?"
슬쩍 준기를 보니 좀 실망한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실수했나? 아무리 머리를 짜고 생각해봐도...
"아~~~호박엿!"
준기가 다희를 보고 웃었다. "...기억..하네."
"그래. 내가 오빠 시험잘보라고 사다주러 가다가 자전거에 치어서. 그래. 그때 병원으로 오빠가 달려왔었지."
"그때 그 자전거가...누구였는지 알아?"
"글쎄...그사람이 미안해 하던거는 조금 기억나는데... 왜? 아는사람이야?"
"....명우였어."
"아.....그...래..?" 세삼 신비로운 기분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때. 이미 만났었다고...? 준기오빠와는 중학교때부터 친구였다고 했으니까...

"그날 명우랑 나랑 치고박고 싸웠거든."
"왜?"
"너를 다치게 했다고, 똑바로 정신 안차리고 다닌다고 내가 다짜고짜 쥐어박았지. 사실은 꼭 사고 때문이 아니라..그냥 너랑 헤어지는게 속상해서 녀석한테 화풀이를 한건데... 하필. 그날이 명우 어머님 기일이었던거야. 그래서 그녀석도 제정신이 아니었고..."
"어....그래서?" 오빠가 그렇게나 속상해 했나....싶어 잠시 그때의 준기 모습을 회상했다.

"서로 영문도 모르고 괜히 한참을 싸웠는데..."
"누가 이겼어?"
준기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게 궁금해?"
"응. 뭐든 끝이 중요하잖아."
어쨌거나 준기의 웃는모습이 참으로 오랫만이어서 였을까? 그의 웃음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다.
"녀석이 나중에 묻더군..."
"뭐라고?"
"너를...좋아하냐고.."
준기가 다희를 보고 미소지었다.
"옛날얘기니까...해도 될까?"
"어. 그럼..." 다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준기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멀리 창가를 보다가 다희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했었지."
표정관리가 무척 곤란한 순간이었다. 웃어야하나. 잠자코 있어야하나. 지난일이니까 가볍게 넘어가야 하나. 심장이 다시 바빠지고 있었다.
"이번에 너랑 다시 만났을때, 명우가 또 묻더라."
다희는 용기를 내어 준기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준기는 특유의 부드러운 눈길로 햇빛나는 창밖을 보고있었고,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준기는 항상 그렇게 모든사람을 품어줄수 있을것같은. 친절이 몸에 배어서 어떤상황에도 말투나 행동이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려하는 노력이 깃들어져 있었다.
지금의 미소도 그랬다. 내뱉기 힘든말을 하면서, 저렇게 편하게 웃는이유는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