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기가 힐끔 다희를 보았다. 다희는 금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 난 쿨해. 어떤말을 해도. 좋아. 하는 얼굴로...

"그런걸...그사람이 왜 물어봐..?"
"그치? 이상하지?"
"....어.."
"솔직히...널 다시 만났을때...정말 기뻤어."
다희의 심장이 또 다시 철퍼덕 내려 앉았다. 오빠가...무슨말을 하려고 하는걸까...
"그치만. 추억은 추억이고. 현실은 현실이니까."
준기의 표정을 돌아보았다. 입가에 여전한 미소...그러나 조금 무거워보이는...

"명우가...나 때문에 일부러 너를 더 피하는것 같아서...말 해주는거야.  녀석이 널 피하더라도...오해 하지 말라고."
"...왜? 왜 날 피할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녀석은...내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든."
......

"다른 뜻은 없으니까 - 불편하게 생각하지마. 자. 이거."
준기가 들고있는 쪽지에는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혀져 있었다. 다희는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지금. 오빠가 명우씨와 나를 도와주려고 이런말을 하고있다는 거지..?"
"그날...너가 명우를 병원으로 데려온날...내가 명우한테 물었지...다희랑. 어떤 관계냐고...명우가 화를 냈어. 그런거 아니라고...훗....근데...그녀석은 내 앞에서 아무것도... 못 숨기거든. 20년 우정이. 뭐 그런거지."
"오빠. 정말 수고했는데. 난. 이런거 정말 싫어. 복잡한거. 취미 없거든. 그 사람 혼자 착각하고있는 삼각관계같은거. 말려들고 싶지않아."
"명우가...혼자 착각하는게...아니면..?"
다희의 눈이 똥그래져서 준기를 돌아보았다.
준기가 다희의 눈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슨 의미야. 그건. 내가 그사람을 좋아한다는 거야...아니면..."
"내가. 정말 널 좋아한다면..."

준기의 얼굴이 진지했다. 다희도 잠시 굳어서 눈만 깜빡거렸을뿐...
"....미안해. 이런말 하려고 한게 아닌데...그냥...못들은걸로 해줄래..? 실수했어. 미안해."
준기가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오빠! 준기 오빠!" 준기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희도 머뭇거리다가 돌아서서 자신의 오피스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이거 어찌된 영문이야...그럼...준기오빠가...? 방금 그를 그냥 그렇게 보내버려서 미안하기도 했다. 오빠가...많이 무안했을텐데...실수로 한 말이지만...진심인것 같았는데...말하고 곧장 후회하던 그 모습이...다희의 맘을 쓰리게했다. 오빠는 지금 너무 힘들고 아파서 기대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한거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희는 기꺼이 그 오빠의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준기오빠는 다희가 절대적으로 믿는사람이었으니까...아니. 다희가 기억하기에 첫사랑이라는게 있었다면... 그사람은 준기였을테니까...

그럼...명우씨는...힘들어하는 준기를 위해서..조용히 빠져준거란 말이지. 아주 흔적도 없이 꼬리를 감추었다...이거지...? 그럼 그날 밤에는 왜 찾아와서 염장을 지르고 간건데..? 그래... 그날밤만...하고싶은데로 하겠다고...물어봤었지. 그소리가...이 걸 두고 한말이었나.

다희 자신이 좀더 솔직했다면...아니. 솔직히 인정한다면. 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건 분명히 명우가 혼자 착각하는 삼각관계가 아니었다. 제대로 꼬인 삼각관계 그 자체였다.  준기는 다희를 좋아하고. 다희는 명우를 좋아하고. 명우는? 아니. 잠깐. 서정이. 서정이는? 명우는...서정이를 좋아하나? 그럼 삼각관계가 아니라 릴레이잖아? 퍼뜩 눈이 떠졌다. 그리고 이 야리꾸리한 상황에서 지도 그리듯이 관계를 성립하고있는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또..내가..준기오빠를 좋아할수도...있지..?

문제는. 준기가 다희를 좋아하고. 명우가 사라졌고. 서정이와 명우의 관계가 뭔지를 모른다는것. 딱 꼬집어서 그 셋이었지만. 서정이는 결혼했쟎아? 근데 잘 사냐고 물었을때 매번 회피하던 그녀의 태도. 혹시....?

서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더이상 꼬인다 해도 대책이 없으니 궁금증이나 풀고 사랑하는 친구나 보자...뭐 친구들끼리 서로서로 양보하기 놀이도 아니고. 이게 대체 어디로 흘러가는거야?
"다희야!"
"서정아. 뭐해?"
"응...지금...남편이랑 같이 있어."
"어.....그..래?"
"...너 일 끝났어?"
"아니. 아직. 오늘 6시쯤에끝나는데...너 바쁘지?"
"아니야. 저녁시간 괜찮아."

서정이를 집으로 초대했다. 모처럼 퇴근시간을 한시간 땡기고, 집에서 간단한 저녁을 준비했다.
"고마와. 너 피곤할텐데.." 서정이가 정말 기뻐해서 다희도 기분이 좋았다.
"피곤하긴. 항상 하는일인데..."
"아...무슨 말부터 하지? 정말 할얘기가 너무 많은데.."
"아무얘기나. 너 얘기라면 아무거나."
"남편얘기 물어볼줄 알았는데."
"물어보길 바란거야?" 다희가 장난스레 흘기며 말했다.
"아니...나. 지금 별거중이야."
'응? 별거?"
"나 참 나쁜애거든."
"..왜..?"
"그 사람. 조건만 보고 결혼했어. 결혼하면 맘도잡고 명우오빠도..다 잊혀질줄 알았는데...그게 아니더라."
"..그래..결혼생활 이란게...쉽지 않다고 들었어..."
"정말 힘들었어. 남편에겐 미안했구...결혼...너무 서둘렀거든."
"......"
"나 바보같지...? 정말 바보같지...?"
"그래. 바보같네. 결혼했으면. 끝까지 사랑해야지. 사랑하지 않는데..결혼은 왜 서둘러 했어?"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한다니까...사탕발림 안해줘서..."

"명우 그사람이...너랑 어떤관계였길래..."
"내가 죽도록 사랑했고...나중에는 그 사람도 나를 받아주었고..."
"혼자만 좋아했다더니...? 그건 아니었구나...근데 왜 헤어졌어?"
"사실..그 사람...사랑했지만 막상 결혼은 자신이 없었어...오빠 새어머니가 나를 많이 괴롭혔거든. 우리는 집안도 그리 대단치 않고, 재벌도 아니라서...명우오빠는 항상 동생 뒷치닥거리 하느라 바빴고..."
"...."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조폭여사...으윽...갸날픈 서정이가 그 여인이 휘두르는 폭발적인 성질을 어찌 견디었으랴...
"명우오빠한테...정말 큰 상처를 주고..내가 떠났어. 그래서 지금 벌 받나봐..."
"..." 한숨이 새어나왔다...서정이를 충분히 이해할수 있었지만...그 사람..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정말 상처 투성이구나...싶어 마음이 저려왔다.

"남편이랑...잘 해봐...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고마와 다희야...역시 너하고 얘기하면. 뭐든 조금 정리가 되는 기분이야."

서정이와 다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준기오빠 얘기는...서정이도 일부러 피하는 눈치였다. 우리의 우정이 소중한 만큼, 준기오빠와의 관계도 조심스러워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