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이가 돌아간후 텅 빈집에서 다희는 잠을 이루려 애썼다.

자신을 부인하는것에 지쳐버린 다희는...떠오르는 명우 생각을 이제 지우려 노력하지않았다.

처음 그를 민우씨인줄 알고 인사하려고 했던 순간부터..
화실에 준기오빠를 찾아갔을때 보았던 그의 그림. 그리고 두서도 없이 저녁이나 먹자고 했던 그와의 첫대화... 준기가 소개시킬때 어린아이같이 고분고분하던...그때 다희의 이름을 듣고 준기가 예전부터 좋아했던 여자라고 생각했던것일까?  그래...그때부터 그는 쭉 더 쌀쌀맞았던것 같다. 그후. 오만원을 줬다가 받았다가... 다희가 아팠을때 정성껏 치료해 주던 사람... 방송국에서 예상 밖에 만났을때도 썰렁하니 인삿말도 건네지 않더니..다희와 저녁먹으러 가면서도 토닥토닥 말을 치고받았고..

준기가 힘들어할때 다희를 끌고나와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앞에서 약해보이는게 죽는것보다 싫다던...그래..그때도 명우는 준기가 다희를 좋아한다고 말해준거나 다름없었다.  그날밤. 유난히 더 까칠하게 굴어서 다희가 정말 열받았었지. 서정이와 마주쳤을때 들고있던 커피를 떨어뜨리며 놀라던 그의 표정. 모두 모여 식사할때 서정이와는 눈도 올려다 보지 않던... 그리고 모두 떠나가고 단 둘이 마주앉아 병이니 의사니..주고받은 이야기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으면서도 하림을 지켜주려고 조폭여사에게 소리지르던 사람.. 아프면 아프다고 치료받을줄도 모르는 바보같은 사람... 그리고 불쑥 찾아와서는 하고싶은 말을 하고...보고싶은 사람을 보고싶다고...

내가...보고싶었다는 말이였나... 그럼.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한건가.
가만. 생각하니 정말 나쁜놈이네.
자기만 마지막이면 다야? 인사도 없이...하여튼 인사성 없는건 알아줘야해...
그럼 그 사람은 나도. 준기오빠를 좋아한다고 믿고있었을까?
하긴 준기오빠한테는 내가 언제나 다정하고 부드러웠지.. 준기오빠가 나에게 그런사람이었으니까..
오해 할만도... 처음에도 내가 준기오빠를 찾아갔다가 만난거니까...

휴....한숨만 새어나왔다.
어디로...갔을까...
뭘 하고 있길래?
다희는 베개로 얼굴을 파묻었다. 몰라. 에이. 이런거 정말 싫어!

다음날 점심시간에 지수가 불쑥 병원으로 찾아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민지. 보려 오셨나봐요? 준기 오빠랑 민지. 방에 있을텐데요 -"
"아니요. 저. 다희씨 만나러 왔어요. 아무리 바빠도. 점심은 먹고 살죠?"
"아...예..그럼요.."

병원내 식당안. 음식을 들고 앉자 마자 지수는 입을 열었다.
"다희씨. 나. 솔직한거 알죠?"
"예? 아..."
"나. 준기씨 사랑해요."
다희는 말을 잇지못하고 눈이 똥그래졌다.
"근데. 준기씨는." 지수가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김밥을 입에 확 집어 넣었다.  그녀의 눈가가 조금 젖은듯 했는데...
"첫사랑이 돌아와서. 맘을 잡지 못하고 있어요. 물론. 지금 상황이 어려우니까 뭐든 붙잡고 싶겠죠. 다희씨가 그 첫 사랑이었다는건. 저도 얼마전에 알았어요. "
다희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물만 홀짝홀짝 들이켰다.
"결혼하기 전에도. 준기는 다희씨를 잊지 못했어요.  5년전. 연락이 끊어졌을때...한참을 방황하다가...집에서 하도 난리를  치니까 그냥 결혼한거죠. 이렇게 다희씨를 다시 보리라곤. 상상도 못했을거예요. 그땐. 저도 유학중이라 한국에 없었고...내가 준기씨를 사랑하게 된건. 와이프가 사고로 떠나고. 바로 그 이후예요."
"저한테...왜..그런말씀을...하시는데요?"
"다희씨는 어떤지. 궁금해서요."
"네...?"
"제가 보기에. 다희씨는 아닌거 같거든요. 준기씨. 좋아하지만. 그냥 오빠로써 좋아하는것 같은데. 아니예요?"
"그런것...같아요...깊이 생각해볼 겨를은...없었구요.."
"깊이 생각해 봐야할 일이 아니죠. 그런건. 마음으로 확 오는거니까. 지금 한 대답이 솔직한거예요. 정답이라구요."
"그런가요..?"
"그리고. 여기." 지수가 쪽지를 내밀었다. "이거. 준기씨한테서 훔쳐온거예요. 명우 연락처는. 준기밖에 모르니까."
"왜 저한테 이걸 주시나요..."
"우리 명우.. 그녀석.. 서정이한테 그렇게 배신 당하고. 집에선 인간취급도 못받고. 하나 있는 동생이라곤 지앞길만 차린다고 바쁘고. 빈털털이에 직장일도 쫓겨나다시피 해서 관뒀다던데..다희씨가 좀 챙겨줘요."

"아유...제가 뭐 자선사업간가요..불쌍하다고 챙기게.."
"명우 좋아하는거. 아니었어요?"
"네?"
"놀라기는...그것봐요. 좋아하잖아."
"아니...뭘 보고..좋아한다고 단정하세요?"
"다희씨. 얼굴이요. 그 표정좀 보세요. 명우 이름 나오자 마자. 표정이 확 변했거든요? 처음부터 내가 그랬죠? 두 사람. 어울린다고."
"아직. 그사람. 잘 알지도 못하는데요..?"
"명우 백수라고 무시하는거예요?"
"아니요. 그건...."
"걔. 정말 실력있는 애예요.  과외한번, 개인지도 한번 안받고 - 집에서 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동생 뒷바라지한다고 고등학교때부터 아르바이트 하고 다니느라 바빠서 쟤가 어떻게 대학을 가나..했는데 명문대 미술학과에 덜썩 붙어서, 친구들이 모두 놀랬었어요.  대학시절에도. 매일 two job, Three job 알바하고 다니면서. 참. 존경할만한 친구였구,  도와주는사람도 없이 방송국에 인정받는 감독이 된것도.  명우. 노력도 노력이지만. 실력이 있으니까 된거구요."

다희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마음은 이랬다..어휴...이렇게 선전 안해줘도 되는데... 그런거 아니라도...얼마든지 벌써 좋아하거든...? 요?
"명우씨에게...정말 좋은 친구시네요."
"그럼요. 원래 제가 명우를 좋아했었거든요."
"네?"
"대학교 신입때. 내 전 남친 만나기 전에요. 명우도, 그때 되게 후회했을껄요, 아마?" 지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희도 웃었다. 준기오빠에게...이렇게 밝고 명랑한 지수가...있어준다면 마음이 놓일것 같았다.

"그럼. 저, 가요. 다희씨.
......
다희씨한테 여러사람의 행복이 달린거. 알아요?"

"무슨..뜻이예요..?"
"다희씨가 명우에게 가줘야 준기씨가 포기하고 저한테 올거고. 또 그래야 서정이도 명우 완전히 잊고 현남편과 잘 살게 될거예요. 안그래요?"
"그게...제 맘대로 되는일인가요...그리고. 명우씨 맘은...어떤지...모르잖아요..."
지수는 싱긋 웃었다. 다희의 맘을 이미 알았다는듯한 표정이었다.
"거꾸로 생각하지 말아요. 서정이가 아직도 미련 못버리는 옛남자라서 안돼고, 준기와 명우사이 의가 상할까봐 안돼고. 그렇게 피하는건. 바보같은 명우나 하는짓이예요. 알죠?"
"정말...간단하네요. 지수씨는...시원시원하셔서. 좋아요."
"그리고..무엇보다..."
지수가 다희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약간의 미소를 담고...

"다희씨가...지금까지 기다려온 사랑을 찾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