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퇴근할시간이 다가오자 심장이 쿵쾅쿵쾅...뛰어왔다.
옷을 갈아입고, 핸드백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쪽지를 꺼내들었다.
자리에 앉아 다희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쪽지를 물끄러미 보면서 폈다 접었다... 망설이다가.
결심한듯이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쪽지에 써있는 주소를 따라가보니, 시내에서 벗어난, 아주 작고 초라한 화실이었다.
다희는 조그만 창문사이로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봤는데...
비어있는 화실안에 불이켜져 있었다.
문을 살짝 밀어보니 스르륵 열렸는데,
드문드문 이젤에 놓여진 그림들이 보였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투명한듯 아름다운 가을하늘과 만나는 절벽. 그 아래로 떨어지는 햇살과 나무들의 조화... 어떻게 이렇게 하늘이 투명해 보이는지...그 기법이 특별한건지. 다희는 넋을 놓고 그림을 보고 있었다.  순간 덜컹. 소리가 났고, 다희가 놀라서 문쪽을 돌아봤는데,

그리웠던 모습이었다.
일주일 하고도 이틀이 지난. 그의 얼굴은 상처가 거의 아물어 깨끗해져 있었는데... 
마주 보고 서있는 두사람사이로 한참동안 조용한 침묵이 깨지지 않았다.

"왜 왔어요."
다희는 잠자코 그를 보고만 있었다. 왜 보고싶었을까. 저 쌀쌀맞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는 드디어 무슨생각이 들었는지 다희의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돌렸다.

"하고싶은데로 하고 사니까. 편안하세요?"
"....."  그는 아직도 시선을 딴데 두고있었는데..
"전. 그날 이후로. 아주 불편했거든요."

명우가 한숨을 쉬고, 벽에 걸려있던 빗자루를 집어들었다.
"치우고. 가야해요. 별거 아닌거 같은데. 더 늦기전에 이만 가보시죠."
다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별거...아니라구요?"
명우는 곧바로 바닥에 떨어진 붓들을 하나 둘씩 집어들고 청소를 시작했다.
뭐든 던져서 명우를 맞추고 통쾌하게 돌아서고 싶었지만.
다희는 잠시 묵묵히 청소하는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명우가 빗자루를 내려놓았다. 이제는 걸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희는 정말 기가차서 할말을 잃고 이제는 웃음이 나왔다. 차. 나 참. 기가막혀서. 내가 미쳤지 미쳤어.
"잘...하시네요. 딱 제격이에요. 아예 이번기회에 청소를 전문직으로 삼으시죠? 우리 아파트 고정으로 치우시는분. 요 근래 관두셨는데, 제가 선전 좀 해드려요? 뭐. 그것도 아무나 하는건 아니지만. 잘 못하면 금방 교체되더라구요."
명우는 말없이 걸레질을 계속했다.
"조기. 조오기. 그쪽도 깨끗히좀 해봐요. 거기도 빠뜨렸네, 거기 책상옆."
드디어 그가 지친눈으로 다희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하는거예요?"
다희는 그를 똑바로 째려봤다.
"사람 놀려먹는게. 얼마나 재밌는건지. 한번 해본거예요."

명우의 표정이.
눈을 내리깔고 아픈미소를 짓는 그의얼굴이.
이마에 맺힌 그의 땀방울이.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는 그의 옆모습이...

다희는 더이상 그자리에 서있을수가 없었다.
이제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까지 들어서..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서 화실문고리를 붙들어 열었는데, 삐그득...하는 사이에

순간. 등이 따뜻해졌다.

명우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에게서. 알수없는 향기가 났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난다는 향기인가.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지면서, 다희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꼭 안겨있는 명우의 품안이 포근하고 따뜻해서...왠지. 눈물이 나오려고했다.
명우의 숨소리가 귓가에서 편안한 음악같이 미세하게 들려왔다.

"이럴거면서...튕기긴 왜 튕겨요..." 다희는 갸날프게 혼잣말하듯 말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 특유의 조용한 미소가 느껴졌다.
"튕기는거 아니예요..."
"그럼... 뭔데요."
다희는 그의 두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싼채 몸을 돌려 명우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널 사랑하게 될까봐..."
갑자기 확 말을 놓는 그의 한마디가 다희를 거의 혼수상태에 빠뜨렸다.
무슨말을 해야하는지. 앞이 하얘지면서. 그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볼에 차가운 눈물이 느껴지면서 다시 그의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

"사랑하면...좀..어때요..." 다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명우가 다희를 물끄러미 보고있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조용히 다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는데.
다희가 그의 손을 꼭 잡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희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가볍게 맞추었는데...
잠시 온세상이 모두 고요했고 시간도 멈춘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