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사랑하게 될까봐...
명우의 한마디가 다희 귓가에 쉬지않고 맴돌았다.
다희는 꿈을 꾸는듯. 자신도 믿을수 없는 환상에 빠진듯...눈을 천천히 뜨고 지금 앞에 서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모든것을 잃어도 이 사람을 잃고싶지 않았다. 신뢰. 믿음. 우정...그것들을...잃는다 해도. 그런데 그는. 다희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수있을까...순간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랑할수...있어요? 다른사람들이 힘들어해도...?"
명우가 다희를 똑바로 보고있었다. 그
의 맑고 짙은 눈동자가 마치 거울이 된듯. 불안해하고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없어요? 준기오빠 때문에...? 서정이...때문..."
그때 갑자기
꽈당. 거친 소리와 함께 화실 문이 활짝 열렸다.
잠에서 깬사람처럼 다희는 얼떨떨하니 문쪽을 돌아보았다.
두사람은 잡고있던 손을...스르르..풀어놓았다.
"벌써...와 있었네..?"
서정이였다.
처음보는 표정이었다. 언제나 사랑스럽고 다정했던 친구 서정이의 조금은 살벌한...차갑고 냉정하지만 반면 무척이나 지친 모습. 슬픔에 잠겨있는 눈가가 벌겋게 부어올라있었고 눈물이 ㅤ맺혀있었다. 서둘러 왔는지, 숨이 가빠보였다.
다희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입을 벌려 무슨말이든 하려했으나, 힘빠진 바람이 불어질뿐,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지수언니가. 연락처를 줬다면서?" 서정이가 헐떡이며 다희를 보고있었고
명우는 냉정한 눈빛으로 서정이를 지켜보았다.
서정이가 시선을 명우에게 옮겼다.
"오빤...내가 만나달라고 그렇게 연락을 하고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더니. 이렇게 바쁘게 지내느라고 내 연락을 무시한거야? 그리고 다희 넌. 나한테 아무 말 없었쟎아! 며칠 전 만해도. 난 널 믿고 너한테 모든걸 얘기해줬는데...넌...아무 말도 없었잖아!"
서정이 말이 틀리지 않았다..그래도...뭔가...무슨 말이라도 해야하는데...
"...무슨 말이 하고싶은데..."
명우의 목소리에 처절히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의 기억이 묻혀져 있었다.
"오빤 몰라. 내가 왜 이렇게 살고있는지. 내가 왜 오빠를 떠나갔는지!"
서정이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희는 무의식중. 명우의 두 눈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서로...정말 사랑했었구나... 명우가 서정이때문에 많이 힘들었었구나..하는걸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명우가 다희의 불안한 맘을 알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서정이의 우는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는지...두눈을 감았다.
"오빠 어머니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 서정이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용서하려고 해도...잊으려고 해도...지워지지 않았어! 아니. 이제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 떠나고 나서. 얼마나 내가 오빠 사랑하는지. 더 잘알게 됐으니까. 이제는 그런 협박이나 굴욕에 넘어지지 않을 자신 있다고...그렇게 믿고 돌아왔어. 난. 참 바보야. 그렇게 상처주고도...오빠맘이 여전하기를..바랬다면. 내가 바보지...난. 내가 가진 모든걸 버려도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떠났으면. 행복했어야지." 슬픔에 젖은듯한 명우의 목소리가 다희의 가슴을 때렸다. 아직. 서정이를 사랑하는건 아닐까. 잊지 못한건 아닐가...이제라도 돌아온 서정이에게로 마음이 흔들린다면...
"행복? 내가 오빠를 떠나서 행복하기를 바랬어? 그래...오빠는..행복했어? 내가 없어져서, 좋았냐구. 아니. 지금 행복해지구 있는데 내가 방해하는건가?.."
명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사랑했던 이 여인의 모습을 늘상 그래왔듯이 버릇처럼 가슴에 파묻으려 애썼던것일까...서정아...넌 왜 자꾸 이사람을 아프게 하니...
"서정아..." 드디어 다희입에서 한숨같이 기어나온 말이라곤...서정이의 이름뿐이었다. 울고있는 그녀가 너무나 가엽고...안타깝고. 그치만...사실은 조금...밉고...
"다희...너가 이럴줄은 몰랐어..."
"나도...몰랐어 서정아...그치만. 명우씨...이제 고통받는건..그만해야 되지 않겠니? 너무..오래 힘들었잖아. 너도 잘 알잖아."
서정이가 다희의 뺨을 걷어 쳤다.
"서정아!" 명우가 소리쳤고,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다희는 잠시 눈을 껌뻑거렸다.
"친구라면서. 잘난 내 친구 다희. 난 너에게 솔직했어. 너한테 내 속에 모든것도 털어놀수 있다고 믿었거든. 너를...세상에서 제일... 믿었으니까.. 준기오빠의 맘도. 내 맘도. 옆에서 지켜보면서 너 아주 재밌었겠구나."
다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내가 맞을 짓을 한건가? 그런건가...잠시 헷갈리다가..
"너. 결혼했잖아. 명우씨 버리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다면서. 너 남편이 널 만나러 여기까지 왔잖아. 그 사람은 어떻게 하려고..? 그리고... 나. 잘못한게 있다면. 그래. 나 자신에게. 너에게도 솔직하지 못했어. 나도. 내가 이럴줄은...몰랐어. 진심이야."
"진심이라고? 그건 어떻게 믿어? 내가 이제 너를 어떻게 믿어? 5년동안 연락없이 소식 끊은것도 너였잖아. 너 똑똑하고 바쁜애인줄 알았으니까 곧 연락 오겠지..오겠지...하며 찾아헤매고. 기다렸어. 넌. 한번이라도 노력했니?" 이제 옛날일까지 끄집어내고....
"서정아. 나도 한국에 오자마자 너 먼저 찾아갔었어. 정말이야. 준기오빠를 만나지 못했으면, 내가 무슨수를 써서라도 찾으려고 했었어."
"그래서. 날 그렇게 생각해서 내 마음따윈 상관없이 명우오빠한테 접근한거야?"
"서정아...그만해..." 명우가 안타깝게 그녀를 불렀다.
"오빠한테 한가지만 물을께."
서정이와 다희는 동시에 명우를 보았고, 명우는 서정이를 보았다. 표정만 봐도 알수있었다. 그의 가슴이 미어지고있음을...
"오빤. 다희. 사랑해?"
명우가 진지한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서정이를 안타깝게 보고있었다.
"그래...사랑해."
서정이가 무너져내렸다.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왔고, 그녀는 쓰러질듯이 벽에 기대어. 초라해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다희는 배신자가 된 기분을 씻어낼수 없었고...명우도 죄인이 되어 창밖만 보고있었다.
..서정이인데...나의 소중한 서정이인데..다희는 서정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싶었지만... 그녀를 아프게 하는 나쁜사람들을 혼내주고 싶었지만...아무것도 할수없는 사실이 더 마음 아팠다.
그때 소란스레 뛰어오는 두 쌍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는데,
지수와 준기였다. 지수가 세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유...내가...이럴줄 알았다니까...아까 서정이 표정이 심상치 않더니만... 내가..더 말렸어야 했는데..."
준기가 급히 뛰어 서정이를 붙잡아 안았다.
"서정아..너 뭐해? 왜 이러고 있어? 이 바보야!"
준기품에 안긴 서정이는 힘없이 기대어 소리없이 울었다.
준기가 잠시 명우와 다희를 올려다 보았다. 다희는 준기의 눈길을 피해 바닥을 주시할수 밖에 없었고... 명우만 준기를 똑바로 보고있었다.
준기는 말없이 한숨을 쉬었고, 서정이를 일으켜 세웠다.
"가자...오빠가 데려다 줄께..."
명우가 준기의 어깨를 잡았다. 준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러 명우의 입술을 터뜨렸다.
"미안...하다. 모르는건 아니지만...내 동생 울리는건...못 참겠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토록 순하고 착한 준기가 주먹을 휘둘른것이 다만 서정이 때문만은 아니었을것이다.
명우는 입술을 훔치고. 괜찮다는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기가 미안한 표정으로 잠시 명우를 보다가...다희를 보고는 이내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준기와 서정이가 밖으로 나가고...지수가 잠시 말없이 문가에 기대어 서있더니..
"이정도는. 예상했지? 뭐...사랑이. 그렇게 쉬운건 아니니까."
지수가 명우에게 다가와 섰다.
"너무 걱정하지마. 서정이 남편. 내가 만나봤는데 서정이 정말 사랑하더라. 이제 서정이도 마음 잡고. 다 잘 될거야. 알지?"
명우가 한숨을 쉬더니 지수를 조금 찌푸리며 보고 말했다.
"넌. 왜 내 연락처를 뿌리고 다녀?"
"준기 책상에 있길래...슬쩍해서 다희씨한테 줬는데. 거기까지만 했다면...너한테 칭찬받았을텐데...그치? 근데..글쎄 서정이가 찾아와서 달라고 난리를 치는거야...너가..전화 안받는다고. 준기가 안준다구. 나도 모른다고 시치미떼다가...하도 졸라서. 그리고 생각해보니 어차피 이렇게 될거면...꼭 피할일은 아닌것 같아서. 안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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