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영화제의 수상 소식이다. 

고혹적인 주인공 옆에는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감독이 예의 까칠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정작 수상의 쾌거 보다 두 남녀의 연애사에 열을 올렸다. 

매력적인 그녀는 부녀 같은 나이차를 넘어 아비이자 한 여자의 남편인 감독과 무모한 연애 중인 모양이다.

화려한 애인들을 가졌던 그녀가 왜 기혼의 중년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지 에서 시작된 얘기는

 가정파괴범이라는 수순을 거치며 자연스레 가십거리가 되었다.

커다란 창 가로 자리를 잡고 앉자 

막 아이들을 등교시킨 홀가분한 여인들이 비어있던 옆 테이블로 몰려온다. 

그녀들도 뉴스를 들은 모양이다. 

하긴 공통의 화제로는 연예계만큼 만만한 것도 없다.

신성한 가정의 울타리를 허물고 들어 온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며 

조강지처를 버리고 미색을 탐한 남자의 파렴치함까지 빵과 커피에 적절하게 섞어서 나무라기 시작한다. 

연일 내리는 비는 도시와 사람들의 건조함을 씻어내고 있고 

통 창을 우산처럼 이고 앉은 그녀들의 가정은 신뢰와 사랑으로 쌓아올려진 철옹성같이 견고하게 느껴진다.

조금 늦는다는 메시지를 하릴없이 보고 있자니

불륜의 원인을 캐는 여인들의 추적은 개인의 윤리관을 지나 직업에 이른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에 대한 그녀들의 편견이라고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설득력이 있다. 

남편을 기다리며 가정을 지키겠다는 감독의 아내가 화제에 등장하자

혈맹처럼 일사 분란하던 여인들은 두 편으로 나누어졌다. 

괘씸해서라도 이혼은 안 된다는 의견과 챙길 만큼 챙겨서 새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백세 시대와 웰빙문화는 훌훌 털고 새 출발 하는 편에 힘을 실었고

불완전 하더라도 가정이라는 보호막을 자녀에게서 뺏을 권리가 없다는 희생적 모성애는 이에 팽팽히 맞섰다. 

게다가 뻔뻔한 불륜남녀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지 않은 울분도 보인다. 

그녀들이 하등의 관심도 갖지 않을 쓸데없는 내 한 표를 들고

‘암만~!’을 외치며 양 편을 오락가락하는데 

우산도 없이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친구가 보인다. 

빗방울을 툭툭 턴 친구는 미리 주문해 놓은 컵에 한 가득 커피를 따라와 앉는다. 

웬만해선 무릅쓰는 일이 드문 친구가 비 속에 나를 불러 낸 이유가 궁금하다.

신토불이 같은 친구는

아이들의 교육을 핑계로 등이 떠밀려진 이곳에서 몇 년째 아픈 마음을 추스르는 중이다.

열기를 빼려 컵 뚜껑을 열며 툭 내뱉는다.

 “결혼 이란 제도는 폭력이야 문화폭력…….” . 

“한 사람이랑 무조건 죽을 때 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건 

인간의 본성과도 감성과도 맞지 않아. 이성적이지도 않아”

난 뒷자리 여인들의 중론을 서슴없이 뒤엎고 있는 친구의 말에 두 손으로 감싸 쥔 잔을 내려놓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마음을 쪼물딱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홀려 

소유하지도 않은 서로의 미래까지 저당잡고 잡히는 것은 비이성적이라는 것이다.

수채화 같던 친구는 한 남자의 사랑에 감동해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다. 

안타깝게도 남자의 사랑은 담장 밖으로까지 흘러 넘쳤다.

부부 사이의 묘묘함을 알 수 없지만 친구의 마음고생은 짐작 되는 바였다. 

수많은 질문과 만 가지 답들이 생각과 마음을 들락거렸을 것이다.

가타부타 없이 듣기만 하는 내 진심이 때때로 작은 위로를 주었던 모양이다. 

이해는 하되 타인의 아픔을 결코 공감할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걸 아는 나이를 지난 우리였다. 

둘째까지 대학을 보내고도 일 년을 견디던 친구는 곧 자신을 받아준 학교로 공부를 하러 떠날 것이라고 한다.

“결혼은 한시적 계약이어야 해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여전하면 재계약하는 거고 아니면 종결되는 거고…….”

친구는 많은 날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떠나는 길을 배웅해줄 한 사람이 떠올라 비 길을 헤집고 온 모양이다.

“자녀도 고려해야 하고 아무튼 누군가는 시도해야 할 일이야 난 그걸 하고 싶어.

자신의 행복처럼 타인의 감정도 존중해야잖아. 사랑이 마음대로 안 되는 사람도 있는 거고.

자신을 속이며 사는 거나 속이며 살라고 남에게 강요하는 건 죄야. 

그게 합법이라도 ……. “

친구의 눈은 보지도 않는 바깥 거리로 물끄러미 향한다. 

나는 친구가 그간 원망으로 피폐해지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줄 알았다. 

그러나 친구는 남편을, 사람을 이해하려 애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편의 행복할 권리와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행복 그리고 아이들 행복의 공통분모를 최대한 넓히려 

외로운 싸움을 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회나 슬픔의 특이점을 지난 친구의 눈은 빗물에 씻긴 유리창처럼 맑아 보인다. 

친구의 말은 불빛이 되어 결코 들춰 보지 않을 내 맘 속 깊은 곳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다행히 친구는 내 의견을 묻지 않는다.

“넌 정말 그 일이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건 세상을 상대하는 거야”

“알아…….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는 언젠가 끝을 내겠지. 

그러면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겠니?”

뒷자리의 여인들이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 듣지도 못했는데 우루루 일어나 출입문께로 나간다. 

철옹성을 소유한 성주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들 사이에 끼어 있다 한들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내 친구이다. 

이혼을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근황을 들으며 나도 친구가 바라 본 창밖을 봤다. 

사랑과 신뢰와 책임감 사이에서 줄다리는 사람들이 씻겨진 유리 너머로 보인다.

그럼…….몇 년이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