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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날이 있다

사람 사용 설명서 어떤 미시 (Cloee) 2019-7-26  22:11:33


 신상 전화기의 시판은

내가 곧 스트레스 기간을 지나게 될 거라는 말이다.


규모 있는 씀씀이의 남편을 

빛의 속도로 

소비자로 만드는 두 경우가 

전화기와 컴퓨터이다.

속도가 느리진 않은지,

용량이 모자라 불편하진 않은지,

그도 저도 반응이 없으면

엄한 카메라 화상도 까지 불려 나와 

남편으로 부터 엄중한 고초를 겪어야한다.

 

내가 남편의 소비생활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은

그의 경제관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간혹

생뚱맞은 것을 구매하더라도

작은 일탈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뺏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낮은 흙 언덕들을

엉덩이가 까매지도록 콩콩거리며 탈 수 있는 

산악자전거가

소년에게 주는 행복이

한 나라를 갖는 거 보다 더 큰 거처럼

남편의 소비 일탈도 

그것에서 그닥 벗어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우리가

지구의 평화와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나이의 시간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던

만화나 왕사탕이나 딱지처럼

IT 신제품 구매취미는 그에게 그런 것일 것이다.

 

문제는

나를 비롯한 온 식구도 최신 폰으로 장착되어야

남편에게 그 행복의 보따리가 풀어진다는 것이다.

 

지난번 경우엔 더 버텼다간 

남편을 달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게 될 시점의 

언저리인 남편 생일날,

당신에게 주는 

생일선물로

내 폰을 바꾸겠노라는 내 제안에 

흐뭇해진 남편 덕에

온 식구도 과하게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모르는 사람이 남편의 표정을 보았더라면

아마 상당히 다른 전 장면들을 상상했을 것이다.

 

물건은 새 것이 좋고

사람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물건이건 사람이건 오랜 것이 좋다.

 

오래라는 말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낙엽들이 떨어지고

그 위로 또 떨어진 채

긴 겨울을 지나서 

좋은 퇴비가 되는 것처럼.

낯섦들이

그들만의 이야기를 켜켜이 쌓아가는 동안

가을비가 

그 위를 밟고

겨울눈이 덥고 

봄 햇살이 다독이는 사이

익숙함'이 되어졌다는 옛 말 이다.


신상 기기들이

내 시선을 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제품 사용설명서 때문이다.

오밀조밀한 과정을 싹둑 자르고도 

편리함이 가능하다는 건데,

어느 날부터

책 읽기가 불편해지더니

점점 불가능해 지는 게 아닐까하는 염려마저 드는 시력 탓에

건조한 문장이 

앞뒤로 빼곡한 설명서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게다가 이 두 경우는

거의 책 한권이다 보니 

아예 의욕조차 생기질 않는다.


아무튼 내 신상 폰은

여태 그래왔던 거처럼 

다음 신상이 나올 때까지

통신기능 외의 무엇으로도 사용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나에게

부단한 정성과 사랑을 받으며

점점 두꺼워져가는 특별한 설명서가 있다.

 

연인이 부부가 되자

서로를 끌어당기던 다름이 매력에서

서로를 밀어내는 불편으로 바뀌었다.

안타까움이 

섭섭함을 거쳐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지나며

사용설명서가 제품뿐 아니라

사람 개개인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각각 

감성과 지성의 뿌리를 가진 단어로 구성된

설명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은 

남편에겐 

목적지를 연결하는 선이고

내겐 세상구경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남편은

어디를 가야할 때 고속도로를 택하고

나는 동네 길을 선호한다.


감성의 거친 여울이 잦아들 때까지

같이 그 곁에 머물러주는 것이 

위로인 여자와,

원인분석과 신속한 해결이

위로인 남자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건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우리였다.

 

몇 해 전 새벽에

나는 이층에서 그대로 일층까지 미끄러진 적이 있다.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이 온몸으로 퍼지고 호흡도 힘든 지경이었다.

지체 없이 911을 누르려는 남편을 일단 제지시키고서야

내가 손가락도 못 움직이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상태였다.

일단은 그대로 있어보아야 했다.

내 상태를 확인한 남편은

즉각적으로 계단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보며

어느 참에서 미끄러졌는지,

잠은 어느 정도 깬 상태였는지,

레일은 잡았던지,

청소용품을 바꾸었는지,

요즘 건강상태에 이상은 없었는지 물어대며 

당장 계단을 없애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던지 단층집으로 이사를 할 기세였다.

내게 딱 움직일 힘만 있다면

일단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일어나 

남편 출근부터 시키고,

혼자

맘껏

앓고 싶은

내 감성의 강은

남편 사용설명서가 없었다면

격류를 일으키며 

바닥의 진흙까지 쓸어올려

한동안 흙탕물이 일었을지 모른다.

설명서를 읽지 않은 내 탓은 하지 않고

모르는 기능에 대한 짜증을

 애먼 전화기에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남편은 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얼마나 아프고 놀랐소.

내 얼른 살펴보아 다시는 이런 사고가 안 생기도록 하겠소.

약속하오.

그간 제대로 신경을 많이 못써주어 미안하오.” 라고.

 

남편은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모르는 사람이다.

남의 것에 시선을 둘 줄도, 에둘러 말하는 것도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사람이라

혹시 마일드한 오티즘이 아닌가하는 염려까지도 한때 했어야 했다.

물론 내 맘속으로만.

 

세상과 자신을 객관적 개체로 보고 살아가는 남자와

관계를 통해 세상을 사는 여자가 만나면

보편적 갈등을 겪는다.

게다 별책부록으로 딸려있는 

개개인의 설명서를 간과할 경우

그 갈등은 

신묘막측하게 지어졌다는 인간만큼이나 다양하고 다채롭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이고 또 쉽게 변하는 존재이다.

남편도 언제부턴가 

아내 사용설명서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께를 더해가는 사용설명서 없이

날 것인 채로

너른 감성의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가까이서 멀리로,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예쁜 물여울을 쉼 없이 만드는 날이 설혹 오지 않을지라도.

한 사람 안의 또 다른 한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지 않은가.


잠시 시계를 보다

곧 창밖 길 위의 작은 상점들과

나른한 오후의 사람들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여자와

별 말없이

동네 길을 천천히 돌아 운전하는

반백의 남자가 탄 차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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