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이렇게 쌀쌀한 날이었습니다.
밝지 않았던 방, 조금은 냉기가 도는 그 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서른이었던 저는 인생 한참 즐겁게 살 때였고,
마흔이었던 그는 인생을 그만 살아보려다 실패하고
그곳에서 저와 마주했습니다.
그때 저는 사람들을 만나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었고
그는 잘 나가는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은
병원이 아닌 한 재활센터였습니다.
매일이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꽤나 자주 그를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이렇게 그날,
그 방의 온도가 느껴지는 비슷한 계절이 돌아오면 말입니다.
벌써 십년이 넘은 그 만남이 아직도 가끔 떠오르는 건
그날 만난 '닥터 리'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이민 가정의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일겁니다.
"그 집, 아들 공부시키려고 학군 좋은 곳으로 이사갔대"
"그때 이사 간 그 집 아들, 공부 잘 하더니 결국 탑스쿨 갔대"
"탑스쿨 간 그 집 아들, 의사 됐대"
"의사 된 그 아들 결혼도 잘했대"
소위 '엄친아'라고 하는 그 부러운 아들이
바로 그날 만난 닥터 리였습니다.
닥터 리의 엄마는 아들을 위해 학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고
여러방면으로 도울 만큼 최선을 다해 아들을 키웠습니다.
모범생 아들도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듯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그렇게 인생의 탄탄대로가 열리는 듯 했습니다.
꿈 많았던 스무살, 여자친구가 이별을 말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부모님의 이혼 소식도 들었습니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이겨낼 만 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 그는 결국 의사가 됐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습니다.
큰 집에서 살며, 좋은 차도 탔습니다.
소위 말하는 출세하고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속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고 성공하면
행복하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했고,
좋은 학교 가라고 해서 갔고,
의사 되라고 해서 됐어요.
좋은 차, 좋은 집, 다 해봤어요.
사람들은 그걸 가지면 된다고 했는데
나는 그게 다 있는데도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하루하루가 재미도 의미도 없었습니다.
술을 마셔도, 마약을 해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결혼 생활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삶은 점차 피로해졌습니다.
자살. 어떤 의미로는 자신 있었습니다.
"저 의사잖아요.
어떻게 하면 죽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앰블런스에서 눈을 떴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제일 먼저 했는지 알아요?
실패구나.
인생도,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어요.
아무런 희망도 없는데 아는 분이 여기 한 번 가 보라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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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쯤이었습니다.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같이 마주 보고 있으면 저도 눈물을 훔치게 될까봐
살짝 고개를 돌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 눈물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때의 저는 좋은 차, 좋은 집을 향해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한 재활센터에서 만난 젊은 의사가,
한달 전쯤이라면 병원에서 흰 가운을 입고 있었을 그가,
내가 그거 다 해봤는데 재미도 의미도 없더라
나는 이제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아무 것도 없다며
자신보다 10살은 어린 처음보는 사람 앞에서
주루룩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뺨에 남은 눈물자국을 닦는 그를 보며
저는 헷갈리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가도 아무 것도 없다니.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하지.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 거지.
그가 계속 독백처럼 말을 이어갔습니다.
끝에는 뭔가 희망적인 이야길 해줘야 할 텐데
사실 잘 모르겠다.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기쁘게 하는지 궁금하다.
의사니까 나도 봉사를 해보면 기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자신이 없기도 하고, 많은 생각들이 왔다갔다 한다.
그래도 내가 찾던 문이 보이는 것 같고,
그 문을 열면 그 곳에 소망이 있을 것 같다.
열어 보려고 한다.
그는 이렇게 그의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그래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아서 인지
사진을 찍을 때는 뒷모습이 잘나왔냐며 궁금해하기도 하고
실명을 쓸 수 없어 가명을 하나 지어달라고 할 때는
밥 조(Bob Cho) 어떠냐며
"밥 줘, 같잖아요"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간단히 안부를 전하기도 했고,
그의 얼굴이 밝아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더 이상은 그를 그 센터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다시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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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고, 저도 그 도시를 떠났고,
이젠 기억속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끔, 자녀교육에 대한 글을 쓰면서
아니 꼭 글을 쓰진 않더라도, 막상 아이를 키우게 되니
조금 더 자주 닥터 리가 떠오릅니다.
그가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자신을 키워줬다고.
자기도 좋은 아들이었다고.
그런데 엄마가 가르쳐준 행복 공식이
자기 삶에선 통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엄마에게 내 마음이 갈 수 있다면
엄마가 자고 있을 때 엄마 옆에 가서
귀에 대고 말해주고 싶어요.
사랑한다고요"
얼마 전에 닥터 리의 이 말이 떠올랐는데
주루룩 눈물이 이번엔 제 뺨을 타고 흘렀습니다.
그 때는 저 말의 숨은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저도 아이가 있고, 알 것도 같습니다.
엄마에게 마음을 보내고 싶은 마음,
그런데 엄마가 자고 있을 때 가고 싶은 마음,
그래도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은 마음,
사.랑.한.다. 고.... 그 말을 하고 싶은 마음.
엄마를 생각하면
우리 모두의 마음에 드는
그런 여러가지 복잡한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가 커갈수록
만난 적도 없는 닥터 리의 엄마에 대해서도 가끔 생각해 봅니다.
내가 많이 듣고 자란 말 처럼
내가 우리 아이에게 은연 중에 하고 있는 말처럼,
공부 잘하고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업 가져서 편하고 행복하게 살으라고 했는데
그 모든 것을 이룬 아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을 때
그 엄마 마음은 어땠을지,
살아온 모든 과정에 부정되는 것 같아 얼마나 허무했을지,
무엇이 어디부터 잘 못된지 알 수 없어 답답했을지,
마음 속이 찡하게 아파옵니다.
이게 벌써 10년이 넘은 이야기 입니다.
그때의 그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저도 이제 그의 나이만큼이 되고 보니
그가 짊어졌던 삶의 무게, 고민들을
조금은 더 알 것도 같습니다.
가능하진 않겠지만 기회가 혹시라도 닿는다면
다시 한 번 그를 만나 보고 싶습니다.
그가 말하던 소망의 문은 찾았는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는지.
당신을 만난 이후 나는 진정한 행복에 대해 고민하게 됐는데,
그 진짜 행복을 찾고 싶어졌는데,
어디선가 당신같은 사람이 또 울고 있을까봐 마음도 쓰이는데,
그래서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도 하는데,
나를 이렇게 만들어 준 당신과의 만남이 나는 선물 같았는데,
당신은 어땠냐고, 어떻게 살았냐고.
한번 쯤 물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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