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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의 해피스쿨

3. 아버지의 이불 속 이야기 ( 말 엉덩이에 매달려 징용에 끌려간 아버지) Dukhee Choi (Grace150) 2020-1-24  22:07:05

  


 친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친 할아버지가 일찍 깨인 분이라 중국과 무역을 시작해서 집안은 꽤 윤택했었고 일제시대에

부르죠아라고 찍혀서 재산도 많이 몰수 당하고 그로 인해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아서  동경체대에 장학생으로 선발된 아버지를 유학을 못 가게 한 것, 유랑극단을 따라 다니며 호동 왕자 역을 맡은 작은 아버지는 집에 가두고 연극을 못하게 하신 것 정도 밖에는...  완고하신 친할아버지의 말년은 쓸쓸하셨다. 방 두 개뿐인 시골집에서  하나를 차지하고 밖에도 잘 안 나가 다니신 것 같다.

 

 우리 네 자매 중 나만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해드렸다. 그 당시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방에 스텐요강을 두었는데 엄마가 안 계실 때면 나를 불러서 치우라고 하셨다.

 어린 기억에 그 냄새에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리면서도 해 드렸다. 해소기침을 하시던 할아버지의 가래를 뱉어 미끌 미끌한 손수건도 종종 빨아 드렸다. 할아버지의 임종도 네 명의 손녀 딸 유일하게 나만 지켜 보게 되었다. 그 때는 무서운 생각이 안 들고 그냥 할아버지를 깨워보려고 울면서 자꾸 흔들었었다.

 

  친할머니는 키가 크고 허리가 꼿꼿한 점잖은 분이셨다.

 손녀 중 나를 특별히 예뻐했다. 항상 할머니 방에서 같이 자고 엄마가 집에 안 계실 때 밥을 차려 주셨다. 국에 말은 밥과 배추 김치를 물에 씻어서 손으로 찢어 밥숟가락에 올려주고 참기름에 구운 김과  갈치 살을 발라 주셨다. 아무도 없을 때 치마를 들추고 고쟁이에서 돈을 꺼내서 내 손에 살짝 쥐어주시던 기억도 있다.

 

  일제 때 아버지는 징용에 징집되어 가게 되었다. 동경으로 유학을 갔더라면 징용은 안 가셨을 텐데...

 일본군들은 말을 타고 가고 징용에 끌려 가는 한국인들은 걸어서 갔다. 몇 날 며칠을 끝도 없는 길을 가다 보니 탈진 상태가 되어 쓰러진 아버지를 일본군 중대장이 자기 말에 태우고

자기는 말고삐를 잡고 터덜거리며 걸어갔다고 한다. 말을 탈 줄 모르는 아버지는 말 궁둥이에

매달려 희망 없이 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미싯가루와 말린 곡식을 씹어 허기를 때우다 보니 고생을 모르던 아버지는 소화를 못 시키고 토하게 되었다. 중대장은 잠시 휴식을 하는 동안 아버지를 위해 멀건 죽을 끓여다 주기도 하며 인간미를 보여 주었다. 잠깐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는데 자기 나라가 한국에 대해 너무 잘못하고 있는 걸 안다고 자기라도 사죄하겠다고 말했다고 하시며 일본인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라고 하셨다.

 

 일본의 만행을 몸소 겪으신 아버지였지만 그 중대장으로 인해 일본인 전체에 대한 생각이 바뀌셨다. 후일에 아버지는 일본에 출장을 가신 길에 그 중대장을 찾아보려 하셨지만 너무 정보가 부족해서 찾지 못하셨다고 하셨다.

 

  한 때 북한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그랬을까?

 초등학교 어린이가 그린 그림에 북한사람들이 머리에 뿔이 달린 늑대처럼 그려놓았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타고 난 기질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나 정서 등이 다른 북한사람들이지만 같은 한민족이란 점에서 우리는 동질감을 느낀다.

 

 그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지배하면서 우리의 말과 문화를 말살시키고 민족정신까지도 완전히 빼앗으려 말살정책을 펼쳤지만 세계 2차 대전에서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의 추축국이 패배하면서

우리 나라도 815일 광복을 맞게 되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때 미처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사람들이 원한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많이

곤경에 처해서 숨고 도망 다녔다고 한다.

 

 아버지의 일행은 전쟁에 참여하기도 전에  태국에 있는 포로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여기서는 일본인과 한국인에 대한 판도가 달라졌다.

 본국으로 송환되기 전에 몇 달 간 수용소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일본인들은 감옥같이 완전 감금하고 한국인들은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물자도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고 한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 밖에는 할 일이 없는 한국군인들은 낮에는 운동경기를 하고 저녁에는 매일 잔치를 벌이고 각 종 장기자랑을 했다.

 

 생사를 모르고 애태우는 가족들은 동네 어느 집 아들이 돌아 왔다 하면 우루루 몰려가서 자기 아들 소식을 알 수 있을까? 애태우던 그 때 아버지는 젊은 날의 한 때를 즐기고 계셨다.

 

  태국은 아버지의 추억의 장소 중 한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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