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르릉’

밤의 적막을 깨고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윤지야, 나 세영이야.”

“…………………..”

“어쩌면 나한테도 연락을 않고 이사를 할 수가 있니?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무 섭섭하다 얘! ” 

산 동네를 걸어 내려가 동네 어귀 다방에서 세영이를 만났다.

그 동네 통장이신 작은 댁에 주소를 옮겨 놓았기 때문에 더 빨리 찾을 수가 없었겠지.

처음에는 누가 찾아 가던지 간에 모른다고 딱 잡아 떼시던 작은 아빠도, 집요한 세영에게 

백기를 드셨나 보다.                                            

“민이씨가 여름방학 때 와서 너를 찾아 헤메다  그냥 들어 갔다. 이 편지 만나면 주래더라.”

반듯 반듯한 민의 글씨, 윤지는 손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다.

 "어디에 있는거니?

숨바꼭질하듯 숨은 너, 이렇게 가까이에서 숨소리가 들리는데 발자욱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윤지야. 네가 어디에 숨던지 내가 꼭 찾고 말거야!

어제는 갈대를 보러 갔단다. 너와 같이 듣던 갈대의 노래가 왜 그렇게 슬프게 들리는 걸까?

너를 만나면 뉴저지 허드슨 강변의 갈대를 보여 주고 싶었어. 혼자 서 있어도 같이 있는 듯

너의 체온이 느껴졌단다. 갈대처럼 땅 속으로 뿌리를 뻗다 보면 언젠가는 너 있는 곳까지 

가게 되겠지?

내가 찾기 전에 나타나면 용서해 줄께. 장난 그만하고 빨리 나와………………생략’

갑자기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 졌다.

“어제 나한테 전화를 했더라 너 찾으면 바로 알려달래.”

어떡할까? 하는 눈으로 세영이 묻고 있었다.

“나에게 시간을 좀 줘. 내가 연락할 때까지는 절대로 말하면 안돼.”

긴 한숨을 쉬며 세영이 돌아서 갔다.

그리고 다음 해 봄, 세영이는 그동안 사귀던 학교 선배와 결혼을 해서 영국으로 

나란히 유학을 떠났다. 민과의 연결고리가 하나 더 끊어진 느낌이었다.

 아빠의 사업은 회복 불가능으로 두손 들었다.

아예 포기를 하자 마음이 편하신 듯, 아빠는 말쑥한 모습으로 일찍 들어 오셨다.

미국에 있는 고모님께 한 동안 연락을 하더니 아빠 혼자 미국으로 떠나시기로 했다.

닭공장에 취직을 하면 영주권을 빨리 받을 수 있으니 가족들을 데려 가시겠다고 하셨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혼자 서 있는 갈 숲, 빈 대공을 떨며 갈대가 우는 소리를 냈다.

윤지는 점점 속이 빈 갈대처럼 여위어 갔다. 가슴 속에서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오년만에 아빠는 가족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닭공장에서 받는 주급을 몽땅 이민 수속하는 데 들여서 변변한 옷 하나 없었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눈에 띄게 초췌해진 아빠의 모습을 보니 이제껏 어떻게 살아오셨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자! 오랫만에 가족이 모였으니 축하 파티를 해야지.”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다!

긴 겨울이 지나고 소생하는 봄기운이 집안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