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권을 받은 후, 

 아빠가 일하시던 야채가게에서, 윤지와 민지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른 직장을 구하기로 했다.

 영세한 흑인과 스페니쉬들이 많아서 늘 말썽의 소지를 안고 사는 브롱스.

 눈만 돌리면 슬그머니 점퍼 안에 숨기고 가는 덩치 큰 흑인들과 몸싸움도 자주 벌어졌었다.

 찌는 더위에 야채가 푹푹 썩어나가 몇 번씩 겉잎을 벗기어 내며 베이글을 씹던 여름도, 

 비닐 앞치마에 묻은 물이 얼어서 고드름이 달릴 정도로 추운 겨울도 더 이상 잔인하지 않았다.

 오후 두시가 되면 두 딸들이 도시락을 들고 환한 얼굴로 아빠를 부르는 것이 낙이 되었다. 

 딸들은 민첩하게 캐셔도 잘보고 짧은 영어로 손님 상대도 잘했다.

 오전에는 영어 학원에 다니며 토플 준비를 했다.

 민지라도 먼저 공부를 시키고 싶은 것이 윤지의 바램이었다.

“다들 고생하는데 나만 짐이 되어서 미안해.

엄마는 뚜렷한 병명도 없이 아직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은 빨리 건강해지는게 우리를 돕는거야. 이젠 마음 편히 먹어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이 건강해야지.”

잦은 기침에 알러지까지 겹친 엄마의 건강을 고려해서 이사를 했다.

반질 반질하게 닳은 낡은 카펫에, 아무리 약을 뿌려도 없어지지 않고 더 늘어만 가는 

바퀴벌레로부터 벗어나서 새로 마루를 깔은 아파트로 이사한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감 돌았다.

가게 주인인 송노인이 어느 날 윤지아빠를 불렀다.

그동안 아빠의 성실함을 지켜 보고 있었던 주인은 나이들어 가게를 관리하는 것도 힘들어 

이제는 여생을 편하게 보내려고 하니 다달이 얼마씩 들여놓고 가게를 맡아서 해 보라고 했다. 

온 식구가 그 때부터 가게에 매달리게 되었다.

인건비를 아끼려고 아빠는 새벽 4시면 일어나 브롱스에 위치한 가게에 나가셔서 물건을 받아 

정리하고 싱싱하지 않은 야채잎을 떼어내고 물을 뿌리는 등 잔손질을 하셨다.

무거운 과일박스를 운반하는 것도 다 아빠의 몫이었다.

윤지엄마도 식구들 점심을 챙기고 바쁜 주말에는 나와서 상품으로 팔기 어려운 과일을 깎아서 

예쁘게 썰어 팩에 담아 진열했다.

가게에 넘치는 활기를 손님들도 느끼는지 가게는 점점 번창해 갔다.

조금씩 저축해서 한국에 남아 있는 빚을 갚아 나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것이 그들 가족의 신조가 되었다. 

  미국에 온지 2년간을 정신없이 앞만 보며 살았다.

그 동안 불쑥 민의 생각이 날 때마다 혼자 허드슨 강변에 가서 한참을 서 있다 왔다.

민도 이 곳에 이렇게 서 있었을까?

그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음은 더 멀리 있는것 같았다.

가게가 자리 잡히자 스페니쉬 점원을 두 명 두게 되었다.

이제 딸들에게 늦게나마 못다 한 공부를 시키고 싶은 아빠의 바램이었다.

윤지와 민지는 나란히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을 했다.

주말에는 플러싱에 있는 코리안 레스토랑에서 웨이츄레스로 일했다.

하루 종일 서서 무거운 쟁반을 나르다 보니 다리가 퉁퉁 붓고 어깨며 팔 근육이 저려왔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나보다. 야채가게 일이 제일 힘든줄 알았었는데……

언제부턴가 젊은 남자들 중에 혹시 민이 있지나 않을까 살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왁자지껄 떠드는 가운데 그의 소리가 들려 온 것도 같아서 테이블을 치우다 말고 

달려나간 적도 있었다. 한 번은 단골손님에게 오해를 받았다..

“아가씨 나한테 마음 있어요? ” 어느 날 그가 말을 걸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