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의 모습도 떠올렸다. 깍은 듯이 샤프한 그의 얼굴이 생활에 찌들어 푸석해지고 총기를 잃은 눈동자……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밤 늦게 세영의 전화를 받았다. 윤지가 미국에 온 후에도 간간이 전화와 편지를 주고 받았었는데 

몇달 전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아서 한국으로 돌아 간 후로 처음이었다.

세영은 말하기 어려운 듯 머뭇 머뭇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 대학 동창회에서 민을 만났다. 네 얘기부터 묻더라. 방학 때마다 나와서 찾아 헤멨었대………….

다음 달에 결혼 한다더라.”

“…………………”

“너 괜찮니? 아직 민을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세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괜찮고 말고.” 애써 명랑한 척 톤을 높였지만 목이 잠겨왔다.

그 날부터 사흘간을 고열에 시달리며 앓았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일찍 일어 나서 허드슨 강변의 갈대밭으로 갔다.

반짝이는 갈대 사이로 진우의 얼굴이 보였다. 서로 뜻을 같이하고 가진 것을 나누던 청년회원들의 얼굴이

 확대되어 다가왔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야. 휘청거리지만 꺾이지 않는 저 갈대처럼 강해져야지.”

여태까지 민의 환영에 사로 잡혀서 약해졌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가 버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것

첫사랑의 추억은 지나간 추억으로서의 아름다움만 간직해야 하는데……

  겨우내 얼어 붙었던 땅 속에서도 살아 있는 것들은 땅을 뚫고 나온다.

나도 그 동안 겨울잠을 자고 있었던 거야!

아침 햇살을 받은 갈숲에서 부수수 금빛 가루가 날리는 것 같았다.

갈대는 혼자가 아니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긴 대공이 몸을 굽혔다.          

단단하게 뿌리 깊은 곳에서 서로를 끌어 안은 듯 부대끼며 속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