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 그리운 소리, 그리운 풍경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사물놀이패들의 흥겨운 가락이다.

읍 소재지에 있던 우리집은 마당도 뜰도 넓은, 동네에서는 꽤 큰 집이었다.

우리가 살던 방 넷의 본채가 토방 위, 조금 높게 가운데에 놓여 있고,그 왼편 아래로는 대문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부엌 달린 방들이 있어서 세를 놓았고, 본래 채마밭이었던 오른편에도 방들을 들이고 셋방을 놓아 엄마는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 가셨다.

대문을 나가 오른편으로 골목을 돌아가면 당산나무 터가 나온다.
거기엔 몇 백년은 조히 됨직한 커다란 고목, 팽나무 두그루가 서 있었고, 그 당산나무 터에는 아마 유교숭상 하던 시절, 어떤 제사의식이 열려졌을 듯 싶은 비석도 몇 개 세워져 있었다.

설날이나, 추석, 보름날 같은 명절이나 절기가 닥치면 동네의 사물놀이 패들의 흥겨운 농악놀이가 이 당산거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두둥 두둥 둥두둥 두둥”

신나고 리드믹하면서도 뭔가 장중하기까지 한 그 흥겨운 연주가 몇바퀴인지 얼마동안 그 당산거리에서 연주된 후,

그 흥겨운 농악소리가 찾아오는 다음 집은 으례, 우리집 앞마당 이었다.

빨강, 노랑, 흰색의 종이꽃을 부친 화려한 고깔을 눌러쓰고, 허리에는 또 색색 빛깔 천의 허리띄를 멋있게 두르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 사람, 고깔의 길게 늘어진 띄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원을 만들기도 하면서 미친듯이 꽹가리를 두들기는 사람,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뒤를 따라가며 무거워보이는 징을 리듬에 맞추어 한번씩 두드리는 사람, 그리고 그 흥겨운 가락과 현란한 손놀림에 정신을 잃게 만드는 장고꾼까지..

어릴 적, 이 사물놀이 패들이 우리집 마당에 들어서면 그들의 한바탕 현란한 공연이 끝나고 다시 대문 밖을 나서기 까지 이들의 리듬에 넋을 놓고 정신을 빼앗기곤 했는데, 

마당안을 가득히 메운 놀이꾼들의 연주는 나에겐 늘 짧고 아쉬웠다.

동네의 꼬마들이며 몇몇 어른들은 흥겨운 어깨춤도 섞어 가며, 패거리들의 뒤를 따라 다니며, 한나절을 보내기도 하는데, 난 그들의 가락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한번도 그들의 뒤를 따라 다니진 못했다.
그저 그 가락이 멀어질 때까지 귀를 쫑긋이 세우고 소리로만 따라다녔을 뿐이다.

명절이나 절기가 다가오면 당연한 듯이 기대했던 사물놀이/농악패들의 흥겨운 공연이 그립다.

우리 고유의 악기들, 징과 꽹과리와 장고가 어울리어 발산하는 흥겨우면서도 가슴속에 쌓인 한이 있다면 시원하게 날려보낼 만큼 우렁찬 우리의 소리요, 우리의 놀이 한마당이었다.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민족의 혼엔 어떤 흥겨운 가락이 있는 듯하다.

그 흥이 슬픔이며, 끝 모를 한과 엉키어져서

슬픈 가락과 선율을 타고 우리의 아리랑, 한오백년 같은

아름다운 민요로 탄생되지 않았을까..

부산 자갈치시장의 왁자지끌, 아지매들에게서도 그 흥을 보았고,
먼지가 펄펄 날리는 시골 버스안, 햇볕에 검게 그을린 구리빛 손님들의 풍경에서도 그 흥을 보았다.
별 다섯 개의 호텔에서는 물론 그 흥을 찾을 수 없었지만..

주위에 장고를 가르켜 주는 클라스, 고전 무용을 가르쳐 주는 클라스 스케쥴이 신문광고에 오를 때마다 '한번 시도 해봐?' 슬며시 유혹이 올라오지만 몸치인 주제파악을 진즉에 했기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

슬픔도 설움도 기쁨도 한데 어울려 리듬을 이루게 하는 이 흥,
문득 생각해본다.
이 흥이라는 말을 표현할 영어단어가 무엇일꼬?